나는 2대에 걸친 부부의사로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크고 많은 업적을 이룩한 홀가의 2세인 셔우드 홀 내외와 끈끈한 인연을 갖고 있다. 나는 그들이 1926년부터 일하던 해주구세병원에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중이면서 1928년 여름부터 졸업할 때까지 3년을 방학 때마다 실습생으로 가서 그분들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후 여러가지들을 배우게 되었다.
1932년부터는 의사로서 그 병원에서 그들과 같이 일하면서 그분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행하는 크리스마스 실 발행위원 7인 중의 한 사람으로 가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나는 1933년부터는 로제타 홀여사가 평양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을 치료하다 별세한 그 남편 제임스 홀박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한 평양기홀병원(평양연합기독병원) 이비인후과에 근무하면서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크게 감명을 받기도 하였다
1938년 나의 장인께서 사주신 큰 병원을 인수하여 해주에서 '안 이비인후과' 전문의원을 개업하였더니 황해도 전역에서 매일 300여 명씩의 환자들이 몰려들어 문자 그대로 문전성시의 대성황을 이루게 되니 이순이 가까우신 나의 장인께서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병원을 찾아와 춤울 추다시피 하면서 좋아하셨다.
1940년 가을 어느 날 일본사람들의 추방명령을 받고 갑자가 한국을 떠나게 되는 홀 원장으로부터 자기가 경영하는 해주구세병원을 맡아달라는 간청이 왔다.
이것은 연로한 나의 장인께서 나를 아들 겸 사위로 생각해 사주신 그 놀랍게 잘 되는 평화의원을 팔아버리고 월급쟁이로 와서 일하라는 것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었지만, 신앙 양심으로 생각하면 나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홀 원장 가족이 떠남으로 저 구세병원이 문을 닫게 되면
1. 우리 국민들을 위하여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세병원을 설립해준 미국 감리교선교부에 대하여 크게 미안하고
2. 그 병원 하나 맡아 운영할 의사 한 사람도 없는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 초라하고
3. 그 병원에서 계속 무료로 치료를 받아야 할 많은 영세민들의 장래가 걱정이고
4. 그보다도 2대에 걸쳐 생명까지 바쳐가며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던 홀 가족, 특히 나를 의전학생시절부터 기도해주고 또 동역자로 사랑해준 은인-. 게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요양소 설립자이며 첫 크리스마스 실 발행자인 셔우드 홀 박사 내외가 강제로 추방당하는 그 엄청난 충격을 생각할 때, 그가 두고 가는 병원을 맡아달라는 간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며칠을 잠 못자며 고심하다 나의 고향인 평북 선천에 계시는 아버지께 편지를 올렸더니 그 먼 곳인 해주로 곧 쫓아나오셔서 크게 노하시면서 '절대로 안 된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네 장인 어른께 대한 배신 아니냐?" 하시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말씀을 하시는 중, 나에게 주신 금언은 "너 교회에 봉사하려거든 이 잘 되는 병원에서 버는 대로 다 바쳐라. 네가 구세병원에 들어가면 많은 교인들이 너를 교회기관에서 얻어먹는 사람으로 알지, 결코 희생.봉사하는 사람으로 보아주지 않을 것이다" 하신 말씀이다.
'평화의원을 팔고 구세병원에 들어갔으면' 하는 말을 들은 장인께서도 대경실색하시면서 , "말같지 않은 소리 다시 하지 말라.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면 나는 너를 사위라고 하지 아니할 터이니 다시는 내 집에 오지도 말라"시며 크게 흥분하셨다.
그러나 나는 홀 박사의 잔청을 거절할 수 없어 그 잘 되는 내 병원을 팔아서 장인께 가져다 드렸다. 구세병원에 들어가보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말 죽을 고생을 하면서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그 병원은 적산이니 폐업하라'는 엄명을 받고 문을 닫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은 홀 박사와 나 사이가 아니면 절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구세병원을 맡았던 일은 참 잘했던 일이었다고 스스로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나는 8.15 해방 후 인천도립병원 원장과 국립마산결핵요양소 소장을 거쳐 1949년 4월 세브란스병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나는 오매에도 잊지 못하는 홀 원장이 발행하다 왜놈들의 강제추방으로 이 땅을 떠나면서 중단된 크리스마스 실을 계속 발행하는 것이 우리 한민족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결핵이라는 병의 예방과 치료 내지는 퇴치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고, 셔우드 박사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온갖 난관과 애로를 무릅쓰고 1949년 12월 다시 실을 발행하여 보았으나 그 인쇄비조차 거두지 못할 만큼 부진했다.
1950년은 그 원수의 6.25사변으로 부산 피난 중에 정신없이 보내고 1951년에는 기독의사회를 새로 조직하고 그 이름으로 발행하였으나 -실제로는 나 자신이 단독으로 뛰어보았다- 생각대로 되지 않으므로 1953년에는 결핵에 관심을 가진 의사 몇 사람을 모아 대한결핵예방협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사무총장이 된 후 그 명의로 실을 발행하기 시작하여 40년이 되는 오늘까지 오는 동안 크제 성공하여 전세계의 많은 실 발행국가 중 최고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몇해 전에는 그의 고국인 캐나다에서 쓸쓸히 지내는 홀 박사 내외를 대한결핵협회에서 초청, 우리 정부로부터 훈장과 서울시로부터는 명에시민증을 받도록 해드렸다. 또 지난 91년에는 별세하신 두 분의 유골을 모셔다가 정중하게 장례식까지 치러 드리기도 하였다.
얼마 전 주간기독교신문의 제1천호 기념으로 열린 '셔우드 홀 일가의 사랑'이라는 죄담회에 참석하여 여러가지 좋은 엣 말씀들을 주고받은 후, 한국감리교회사학회 이진호 장로의 발의로 '홀연구회'를 조직하기로 만장일치 결의하게 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참석한 감리교 이성삼 목사로부터 로제타 홀 여사가 편저한 남편의 전기를 번역한 '허을의원사적'이라는 책을 이목사님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단 한 권 밖에 없는 귀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란 말을 듣고, 홀연구회의 첫 사업으로 이 책 영인본을 내기로 하였다.
귀중한 자료를 원본으로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제까지 싸주신 이성삼 목사님과 편집과 발행에 수고해주신 이진호 장로와 주갖기독교신문 임병해 부장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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