賀樂醫員(Dr.W.J.Hall)史蹟

제 일장. 허을의원의 선조와 어렸을 때

솔석자 2018. 4. 9. 17:04

일장. 허을의원의 선조와 어렸을 때


    허을의원의 증조부는 근본 아일랜드 사람이요 유명한 선교사들이 많이 일어난 장로회 족속들이라. 증조부가 별세하신 후에 부인이 아이 셋을 데리고 캐나다로 발행하니, 장자 제임스는 석수장이인 고로 공터에 들어가 집을 짓고 사는데 그 집이 지금까지 있는지라. 제임스의 장자는 곧 허을의원의 부친이라.


    1859년 삼십 삼세 되던 해에 볼튼진주부인이 이십 사세 되던 해에 장가드니 부인의 조상도 아일랜드 사람이오 영국교회인이라. 다 향수(享壽)한 사람들이라.

    한 노인은 백세 되던 생일에 큰 나무를 찍어 넘겼으며, 백 삼년을 살았으니 참 기력이 좋으신 이라. 이 내외분이 나무로 울타리를 틀어 집을 짓고 살림을 시작하고 농업으로 살더니 1860년 1월 16일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은 외조부의 명호를 따라 웰염이오 조부를 따라 제임스라 칭하였는지라.


    1년이 못 되어 고모에게 다니러 갔을 동안에 장로교 목사 에빈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걸었으니 특별히 총명스러운 아이라고는 못할지라도 성질이 양순하고 어린아이라도 기념함이 많아 깊이 생각하는 아이요, 어려서부터 선악을 분별하여 어른에게 묻기를 악행하는 아이와 선행하는 아이 가는 곳을 가르쳐 주소서 하고 청하기도 하며, 소년 되던 해에 고모에게 다니러 갔더니, 하루는 문밖에서 나무라는 것을 보고 고모에게 말하되,

   "저기 모든 타는 나무가 합하면 흉악한 지옥이 되겠나이다" 하며 깊이 마음에 생각하고 장성한 후에도 어렸을 때에 받은 가르침을 명심하였더라.

   한국에 나온 후로도 자기 고모에게 편지하였는데, "고모의 은혜와 도덕상에 유익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하옵고 감사함을 고모에게 드리오며 고모의 은덕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때까지 날로 나아가니 어렸을 때에 아이들을 도덕상에 유익한 것으로 교훈하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닌 줄로 깨달았나이다" 하였더라.


   제임스가 어려서부터 효애지심이 가득하여 항상 모친 곁에 있기를 좋아하며 모친이 주방에서 일할 때라도 항상 곁에 앉아서 모친과 같이 음식 만드는 것을 즐거워하였고, 어렸을 때에는 아이의 기질이 약하여 입학함이 더디었으며, 팔세 되던 춘절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공부를 즐거워 아니하더니 차차 공부에 문리를 얻어 공부를 힘쓰나 특별히 총명스럽지 못하여도 늘 직신이 완전하여 공부상에 늘 진보하며 열심으로 진보한 것을 힘쓰며, 못하겠다고 하는 말이 없고 결단코 성취할 마음 뿐이요 동무 중에도 총애함을 받고, 동무들이 서로 다툴 때에 늘 양순한 성품과 말로 판결하여 다툼을 막으니 별호를 얻어 성덕지애라 칭함을 얻었더니,

   하루는 동무 중에 한 불행스러운 아이가 있어 항상 자기를 괴롭게 하고 옷도 찢고 여러 모양으로 괴롭게 하여도 참아 견디더니 과도히 군핍하는 고로 순박한 성질이라 군핍을 받지 않기로 작정하고 숙부에게 묻기를,

   "어찌하면 이 아이의 군축을 받지 아니하리이까?"

   숙부께서 답왈,

   "너도 대신 갚을 것이라니" 한즉, 그 날밤에 학교에서 동행하더니 다시 괴롭게 하거늘 숙부의 명대로 괴롭게 하는 소동을 단단히 때려주었더니 그 아이가 회과자책하였는지라. 다시는 괴롭게 아니하니 비로소 처음으로 때렸으며 마지막이 되었더라.


    부모들은 자기 각 교회에 다니며 아이들은 감리교회 주일학당에 다니게 하니, 지미 십사세 되던 해에 목사 트레블러씨가 부흥회를 시작하였는데 지미 자기가 죄인인 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이 긴한 줄을 깨달았으나 감히 앞으로 나아가 자복할 힘이 없어심중으로 애쓰던 차에 숙부 볼튼씨가 아이 마음 속에 깊이 애쓰는 것을 알고 아이에게 가서 사랑하는 말로 아이를 호위하여 권면하며 데리고 단 앞으로 나아갔더니, 수일 밤이 지나매 목사가 회중에 권청하니 아이가 곧 스스로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구세주의 관유하심의 사랑을 충만히 받음으로 기쁨을 얻고 1874년 십월 이십 삼일에 거듭났으니, 이 날을 극히 기념하며 그날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에 지미 생각하기를 '하늘에 별도 전에는 비추임이 이날과 같이 비추지 못한 줄로 생각함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날에 마음이 밝아진지라.'


    부끄러워 하는 아이라도 그 날 밤에 돌아와 말하기를 모친에게 력력히 고하여 아뢰온 후에 자기가 택한 웨슬리감리회에 입교하였는데 그 후에 이 웨슬리감리회가 감리회와 합성하여 캐나다 감리회가 된지라.

    본래 성질이 순박하고 종용한 고로 회개한 후에도 특별히 나타난 표가 없을 줄로 생각하였으나 그렇지 아니하고 회개하던 날부터 우리를 작별하던 날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그의 변한 것을 분명히 알았고, 또 그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미 같이 남을 위하여 생각하는 아이를 또 보지 못하였다" 하며,

    "항상 남에게 어진 마음으로 선대할 기회를 찾고 학당 방에서도 누가 연필 하나를 떨어트려도 지미가 먼저 일어나 집어주며 불피우는 것이든지 물을 가져오는 것이든지 항상 남을 위하여 섬기니 이런 적은 것으로 섬길지라도 값이 없어도 귀한지라. 이 아이의 재질이 기이하지는 아니하되 다만 사랑스러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익은 연고라. 내가 항상 아이가 학당에 들어올 때에 기쁜 낯으로 오는 것을 즐거이 보았고 학당에 들어온 후에 즉시 산학 책을 펴놓고 이려운 것이 있는 것을 살핀 후에 아무리 어려운 산학이라도 어렵다고 아니하고 조금도 실망함이 없이 직심으로 힘쓰는 것을 보고 아이에게 묻기를,

    '과히 어려우니 그만두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만둔다 함이 천만 의외로소이다' 하고 곧 더욱 힘씀으로 인내와 직심의 상을 받았으며, 또 한 번 내가 그 아이에게 묻기를,

    '네가 농부가 되겠느냐' 하니

    '농부는 아니되겠사오나 제가 무엇에 합당하오니이까?' 묻기에 대답하기를,

    '소자야, 네게 목사나 의원 직분이 합당하니라' 하니,

    '제가 이같이 중대한 책임에 하나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사오나 제가 성적이 없으며 지식이 없사오니 감히 바랄 수가 없나이다' 함을 들으니, 내 마음에 생각하기를

    '모든 학생들이 다 너와 같았으면 좋겠다' 하였고, 짐이 처음으로 공부하던 돌로 진 학교가 지금까지 있고 얼굴과 음성도 다른 아이가 그 빈 자리를 채우나, 나의 사랑하는 영웅의 얼굴과 음성은 없으나 멀고 먼 지방에 나그네 중에서 누워자나 사랑함은 항상 우리와 같이 있고 우리 중에 오래 거하지는 아니하였으나 그의 덕행의 감복함은 영세토록 그치지 아니하고 그 감화함의 이익은 영생에 가서야 다 나타날지라" 하였더라.


   1876년 겨울에 학당을 작별하고 생업을 배우려고 출학한지라. 그 전에 자기 부친께서 식구를 위하여 새 집을 지을 때에 목수들이 일하는 것을 깃거워 하여 살피더니 그 후에 손재질이 능통하여 집안에서 고치는데 익숙하여 가중 재물 만드는 재주가 있은즉 마침 기회가 있어 목수 졸업하려고 장인 스티븐에게 가서 배우는데 학생이 많아 여러가지 기물을 만드는 중 관짜기를 배울쌔, 학생들이 자기 관을 다 만든 후에 잘 되었는지 시험코자 하여 관 속에 누워보는 것을 보고 지미가 처음에는 놀랐더니 차차 자기도 그와 같이 하며, 일하는 시간 외에 친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 주었으며, 그곳에서 배운 재질이 한국까지 가서 본국 장인을 가르쳐 외국 기물을 만들어 쓰며, 교회 집들을 고치는 데 간역하며, 그의 사랑하는 손이 다른 선교사의 사랑하는 자녀의 관도 여러 개를 만들어 주었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