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랍속 사금파리

운주산방에서

솔석자 2007. 5. 24. 19:16


문주산방에서


 

충청도의 끝자락에서 강원도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길목 느릅재 정상 위에는 운주산방(雲住山房)이 있다. 흐르는 구름도 머물러 쉬어 가는 높은 고갯길이라 이러한 이름을 붙였을 게다. 새로 뚫린 자동차전용도로가 터널로 지나가는 바람에 이 고갯마루는 이제 인적이 드물어졌다. 오늘날 고갯마루의 영화는 거의 같은 운명을 맞고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도 그렇고 육십 리 길 죽령고개도 그렇다. 산아래 굴이 만들어지자 장구한 세월동안 온갖 애환을 담고 있는 고갯길은 이제 사람들이 누구나 다 넘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쩌다 한가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잠시 찾아올 뿐이다. 눈이라도 한길 빠지는 깊은 겨울이면 고갯길은 그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세계가 되게 마련이다.

운주산방을 찾은 것은 모처럼의 고향 나들이에서 그나마 잠시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깔리는 고갯마루에는 오가는 행인도 없고 찻집 안에도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감잎 차 한잔을 시켜놓고 타오르는 난롯불 가까이 앉아 주위를 살펴본다. 어려서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농기구들과 작은 항아리, 남포등, 꽹가리 등 갖가지 물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한쪽에 걸린 널빤지 위에 아무렇게나 적힌 시 구절이 눈길을 끈다.

쉼/ 없이/ 달려온/ 고갯마루// 머/ 물러/ 쉬어 가는 /운주산방/

(원문: 쉽/ 없이/ 달려서/ 어데가나// 머/ 물러/ 숨 돌릴/운주산방)

누군가 남겨놓은 그 말이 문득 지나온 반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이 오십에 철든다더니 이제는 앞만 보고 달려온 어제의 ‘이룸’보다도 앞으로 다듬어가야 하는 ‘다짐’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대학에 들어온 지 삼십년 째 되는 해에 ‘홈커밍데이’를 갖는 것은 우리 학교의 전통이다. 본관 앞에 화려하고 붉은 카페트를 깔고 입학식과 졸업식 날 서 보았던 벅찬 감동의 자리에 다시 서서 펄럭이는 호랑이 교기를 가슴 울렁이며 바라보게 될 것이다.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고 쉬어 가는 쉰 살의 목청을 다시 가다듬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작의 날은 있다. 그날의 마음을 언제까지나 간직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 교문에 처음 들어서던 날, 청운의 뜻을 품고 첫 출근하던 날, 오랜 친구가 될 사람과의 첫 만남, 연인과의 첫 번째 데이트,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첫날 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첫 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 아이가 대학입시를 보던 날, 그렇게 해서 세상에 처음 일어나는 일들이 계속되지만,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그 처음의 마음은 자꾸만 퇴색해 간다. 이제 운주산방에 잠시 머물고 있는 구름처럼 우리의 뜬구름 인생에서도 잠시 서서 지나간 첫 날의 설레던 마음을 한번쯤 되돌아보고, 살아오면서 헝클어져 버린 마음을 잠시 가다듬어 보는 것도 좋으리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음에는 오직 순수만이 자리한다.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에는 시기와 질투와 간교함과 거만함이 있을 수 없다. 바깥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우리에게는 지금 아무개 아무개 게이트들만 숱하게 난무하고 있다. 게이트(문)란 본래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이르지만, 지금 그 게이트들은 한결같이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걸고 있는 닫힌 공간이어서 답답하기만 하다. 올해는 세계가 우리의 품속으로 달려 들어오는 해다. 그리하여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안될 것이지만, 우선은 어이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잠시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처음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하겠다. 거기서 우리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오늘 새해 아침은 바로 그렇게 조용히 자신을 생각하며 보내자.

 

■최용철(문과대 교수·중국문학)-고대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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