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의 하나님
1. 구약성서와 고대 근동 세계
1) 고대 근동 세계
고대 근동 세계의 발견은 새로운 문화권을 우리 앞에 열어 주었다.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 이라고 할 때는, 이집트로부터 시작하여 팔레스타인- 시리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까지의 방대한 지역을 말한다.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샘족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비록 역사의 무대에는 나중에 등장하였으나, 히브리 사람들이다. 그들이 남겨 준 구약성서는 고대 세계가 우리에게 물려준 커다란 유산이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통해 알게 된 히브리 문학은, 우선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문학에 비해 그 전수과정이 다르다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특정 민족의 종교적인 역사를 설명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의식에서 처음부터 선별된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처음부터 탈락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약성서의 문학은 그 범위가 매우 좁다. 반면, 문학 전반의 통일성은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히브리 문학이 다른 고대 동방세계의 문학과 다른 점은 구약성서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2) 고대 근동 세계의 신들
고대 세계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다. 종교적으로 보아 고대 세계에는 자연 신관이 성했기 때문에 하늘의 신, 땅의 신, 지하 세계의 신 등 각종 자연물의 신들이 온 우주에 가득차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들 많은 신들 가운데서 어떻게 유일신 야웨를 섬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큰 관심사이다.
(1) 메소포타미아
① 수메르
수메르에서는 하늘의 신 아누(Anu)가 최고 신이었으며, 그는 만물의 창조주로 추앙되었다. 그 밖에 공기의 신 엔릴(Enlil)과 땅의 신 엔키(Enki), 태양 신 우투(Utu)와 풍요의 여신 이나나(Inana)가 있었다. 이들 신들에게는 각기 도시가 주어졌으며, 그 도시 안에는 신을 모시는 신전이 세워졌다.
②바빌론
바빌론의 자연신들은 이름만 달랐지 수메르 신들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시년축제를 바빌론에서는 아키투(Akitu) 축제라고 불렀는데, 이때의 남신의 이름은 타무즈(Tamuz)이고 여신의 이름은 이스달(Ishtar)이다. 성서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빌론의 창조신화이다.
(2)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투쟁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심각한 신화와 설화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집트는 자연이 곧 주어진 축복의 여건이었기 때문에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으로 보여졌다. 이집트의 종교는 만화경을 보듯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3) 가나안
가나안의 최고 신 엘(El)은 신들 중의 왕, 신들의 아버지, 만물의 창조자, 착하신 분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최고의 신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이 그에게 직접 예배드렸던 신전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백성들의 예배의 대상자는 바알(Baal)이며, 그는 승리자 바알, 구름을 타시는 자 등의 칭호를 갖고 있다.
(4) 이스라엘
① 족장시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지역에 있을 때, 이 때에는 이들이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서부로 이끌어 낸 신은 바로 엘 샤다이며, 이 신은 고대 세계에 편만해 있던 최고 신인‘엘’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② 엘과 야웨
노트의 ‘암픽티오니 가설’을 인정한다면,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이집트에서의 경험이 있든지 없든지에 상관없이 모두 야웨 신앙으로 결속되어 부족 동맹체를 형성하고, 중앙성소에서 법궤를 중심으로, 야웨를 이스라엘 민족의 신으로 섬기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각기 지방으로 내려가서는 조상 때부터 섬기던 엘 신을 섬겼다는 것이다.
③ 야웨
야웨의 기원에 관해서는 모세가 장인인 켄족의 부족신을 배워 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④야웨와 바알
바알과 야웨와의 관계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피비린내 나는 격투로 승리를 겨루는데 야웨는 바알을 누르고 유일한 신으로 남게 된 것이라고 한다.
(5) 야웨와 예수
이스라엘에서는 오직 야웨만을 유일신으로 섬겨 왔으며, 야웨 신에 대한 신앙은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을 통해서 야웨 신이 유대교의 신을 추앙되는 것이 사실이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야웨는 구약성서의 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2. 구약성서의 문학적 고찰
1.
성서를 연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신학적인 연구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학계의 관심인 문서비평 등이 있다. 그러나 신학적, 역사적, 문서적, 연구 이외에 성서를 연구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서, 문학적인 연구가 있다. 이것은 성서 역시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한 문학적인 작품으로 보고, 성서 본문의 형태와 이미지, 시적인 효과, 미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작품이 주는 영감과 감수성등을 찾아보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 감정의 감수성, 의식, 상상, 동경에 큰 자국을 남겨 놓았다. 성서는 여러 민족에게 서사시, 서정시, 풍자시, 비극, 희극, 웅변 등 각종 문학작품의 주제와 영감을 제시해 왔다. 구약성서는 모든 다양한 인간 체험을 여러 가지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서에는 무엇보다도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시(時)들이 있다.
2.
우리가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문학장르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한 가지 전제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구약성서의 관점이 어디까지나 현세적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볼 때, 에스겔서와 다니에서의 일부를 제외하면 신비주의라는 것이 거의 없고, 또 내세를 위한 준비나 동경보다는 현세적인 삶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구약성서가 현세적이라 함은 , 그러므로 어떤 윤리적인 이상론에 의한 인간의 행동이나 또는 ‘생각하는 갈대’ 에게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철학적인 사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사랑과 미움, 절망과 환희, 탐욕과 경건, 격정과 겸손 심지어는 생의 저주까지 오장육부를 짜는 듯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3.
히브리인의 사고에는 희랍인처럼 운명이나 우연이란 것이 없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근원이며, 축복은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는 결과이며, 재앙은 그 반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결과라고 본 것이다.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은 이같은 척도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하며, 이기심과 복수심에 불타는 악인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사무엘상에 기록된 사울의 이야기는 다윗의 이야기가 낭만적으로 과장되게 그려진 데 비해 사울의 이야기는 지나칠 정도로 어둡게 그려지고 있다.
4.
구약성서는 희랍의 호머, 이탈리아의 단테,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못지 않은 세계적인 문학작품이다. 밀턴은 맹인이 된 이후에도 아침마다 사람을 시켜 히브리성서를 읽었다고 하며, 그의 유명한 서사시인 ‘실락원’, ‘투사 삼손’ 이 다 구약에 그 주제를 둔 것이다.
구약성서는, 단지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들은 옛날 이야기의 전집이나 또는 주일마다 팔 밑에 끼고 교회에 나가는 예배 의식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의 체험을 돕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깊은 생의 의미를 찾게 도와주는 안내자인 것이다. 인간의 생활은 언제나 계속해서 변화하며, 성장하며, 새롭게 전개되기 때문에, 성서는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서를 새롭게 읽어 볼 수 있는 것이다.
3. 야웨 기자의 이스라엘 원역사 이해
(1) 출발점
종교와 민족의 역사 관계가 우리 나라에서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의 역사를 들추어보아도 명백한 것이고, 더욱이 상고하려는 야웨 기자의 이스라엘 역사가 더더구나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민족사와 종교사라는 것이 우리 이야기의 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2) 신화와 역사
선교 백주년을 맞이한 우리 한국 교회의 한 가지 문제점은, 교인 의식 구조속의 신화와 역사간의 혼동이라고 한다. 야웨 기자가 이해한 신화와 역사의 문제는 나중에 다루겠지만 우선 우리는 신화를 역사로 이해하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건을 신화화하는 위험으로 빠져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야기의 또 하나의 출발점은 신화와 역사의 이해점인 것이다.
(3) 신앙과 신학
신화와 역사와의 관련성은 신앙과 신학이라는 다른 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신화와 역사와의 관계 또한 그 구별이 분명하지 못한 만큼 신앙과 신학의 구별 역시 모호한 점이 있는 것이다. 신학 없이 이루어진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 같고, 신앙 없이 이루어진 신학은 뿌리 없는 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4) 한국 교회의 구약 경원시
우선 백여 년 전의 우리 교회 역사를 거꾸로 훑어보면, 우리가 구약을 경원시했다는 점이 뚜렷이 나타난다. 무엇 때문에 한국 교회는 구약성서를 이같이 멀리해 왔던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들고 있는데, 첫째는 선교사들의 신약 위주의 선교 방법이었고, 둘째는 구약의 비평적 방법에 대한 우려라고 본다.
(5) 신약 위주의 교회
신약만이 궁극적으로 인간 구윈에 관련된 경전을 생각하고, 구약은 재미난 이야기의 전집으로서 주일학교를 통해 소개된 정도였다. 그후 40년대 구약성서 비판문제로 인해 급기야 교단이 양분되었고, 그 후로도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선입견이 굳어져 누구나 구약에 대한 이상한 말을 하면 자연히 신경이 곤두서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그 동안 학문에 대한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일반적으로는 구약성서를 위험한 폭발물로 보는 풍토가 가시지 않은 것 같다.
(6) 구약성서의 조감도
(7) 역사가의 자아의식
(8) 야웨 기자의 역사의식
역사의식이란 곧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의식한 것이다. 야웨 기자의 이스라엘 역사는 작 시대로부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출애굽 사건까지 소급해서 그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9) 출애굽 사건의 의의
출애굽 사건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피압박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부터 탈출해 나온 것이다. 꼭 노예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크고 강하신 손으로 구원하시어 약속의 땅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은혜의 감격”(amazing grace)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경험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합세하여 여호수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은 것이, 야웨 기자가 이해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10)아브라함의 선택
역사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선택이란 계속 넘쳐흐르는 대민족 이동의 물결 중 하나인 것이다. 후대의 이스라엘인들이 추수감사제 때 읊은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신 26:5)란 말대로 아브라함은 아람족 이동의 일부이었지만, 야웨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1) 아브라함의 역사성
우리는 야웨 기자가 아브라함을 부각시켜, 그로 하여금 결국 출애굽 사건을 가능케 한 중심인물들의 조상이 되며,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쓰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시조가 되게 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야웨 기자가 쓴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윗 . 솔로몬 시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에게까지 소급이 된 것이다.
(12) 원역사의 도입
구약성서에서도 아브라함부터는 구체적 역사성을 띠고 있지만, 그 전 부분은 신화적인 요소만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마지막 부분은 소위 신약시대까지의 암흑시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끝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다.
(13) 신화의 성격
고대인들이 직감적으로 그들의 느낌을 신화로 표현하며, 그들의 신비감과 경이감을 나타낼 뿐인것이다, 야웨 기자 역시 창조 신화의 구체적 사건 전개보다는 야웨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엄청난 놀라움을 창조 이야기를 통해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14) 성서는 거꾸로 읽어야 한다
야웨 기자는 아브라함까지의 자기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입장에서 집필되었기 문에, 그는 이 원역사에서 그와 같은 요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이같은 역사의식이 원역사에까지 적용이 되어 바빌론 신화를 이스라엘 신화화한 것이며, 다신교적인 이방 이야기가 이스라엘 신앙에 접목이 되어 유일신적인 사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15) 아브라함의 축복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 12:3)라는 아브라함의 축복은 원역사의 총결론이며, 동시에 원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이기도 한 것이다, 범우주적인 구원의 역사가 민족구원의 역사로 아브라함을 통해 연결된 것이다.
4. 성서의 화해 개념
성서의 중심적인 주제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 스스로가 창조주와 떨어진 간격을 메꿀 수는 없고,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의 길을 터놓은 것이라고 본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1) 구약성서의 죄
구약성서의 죄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행동이나 사고 또는 언어를 통한 구체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도덕적인 악이나 우상숭배는 물론 제사 규율의 파기에도 언급이 되고 있다.
(2) 속죄의 길
구약성서에서 속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은 ‘카파르’이다, 이말의 원래 뜻에 관해서는 ‘씻어 버리다’와 ‘덮는다’의 두 가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씻어 버린다는 것은 마치 때묻은 것을 물로 씻어 없애는 것과 같이 죄를 어떤 물질적인 면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덮는다는 것은 도덕적인 면에서 이제까지 하나님과 인간과의 소원된 관계를 없는 양 덮어둔다는 것이다. 성서의 사상은 속죄의 주체가 하나님이며, 인간이 그 목적이라는 것이다.
(3) 죄와 공동체
이스라엘은 한 개인의 범죄가 곧 그의 운명과 직결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한 개인의 죄를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의 결과는 당사자 개인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제의의 방식을 통해 개인의 죄를 속죄함으로써 기본적인 질서를 되찾도록 애썼던 것이다.
(4) 속죄의 의미
구약성서는 제사를 통해 속죄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여 준다. 대부분은 레위기의 제사법전의 규정에 관련된 구절이지만, 그중에 신학적인 의미를 제시할 수 있는 한 구절이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이 구절은 창세기 9장 4절의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을 다시 확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통해 속죄할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속죄를 받는 것은 인간측이며, 사함을 허락해 주는 측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5) 역사서 내의 속죄
우리는 이제까지 제의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인간간의 화해의 길을 찾아보았다. 법전이외의 역사사와 예언서에서도 우리는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는, 삼상 26장 19절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 중에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야웨면, 야웨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표현이 고대 동방의 다른 종교에서처럼 진노하는 신에게 제사를 드려 신의 분노를 가라앉혀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제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신을 달래 보거나 또는 즐겁게 해준다고 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6) 개인 중보기도
대변자는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죄의 용서 또는 사죄를 요구한다. 이것은 대변자 자신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특히 예언자들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7) 예언서 속의 속죄
예언자들은 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신앙으로 순종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이스라엘은 제의를 통한 속죄라는 것은 아무리 반복을 해도 원래의 상태 그대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된 정결과 속죄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뜻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8) 고난의 종
제2 이사야의 고난의 종은, 레위기 제의법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이 남의 죄를 대신지고, 또 동시에 죄의 형벌을 혼자 당하는 고난을 통해 숭고한 정신적 차원의 속죄의 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 고난의 종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사53:7)과 비교될 뿐 아니라 그의 생명 역시 “속죄의 제물”(사53:10)로 내놓은 것으로 노래되고 있다.
(9) 신약성서의 속죄
신약성서 역시,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롬 11:28)된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주체는 하나님이 먼저 취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를 통해 화해의 길이 이룩되어지는 것을 보여 준다. 레위기 법전에서 피가 속죄를 가져오듯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피가 인간의 죄를 속하는 것이다.(엡2:16) 신약성서에는 구약에서 취급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의 개념이 그대로 적용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5. 성서와 교회생활 속의 축복
(1) 축복개념의 오해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결코 비성서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도되어 복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의 신앙은 비성서적, 즉 무속적인 맹신 상태로 전락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은 그 결과로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복 그 자체가 일차적인 목적이 될 때, 신앙이 복의 실현을 위한 이차적인 시녀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2) 종교사적인 축복
고대 종교에서는 축복이 거의 마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마치 화살이 쏘아 졌을 때는 뒤로 돌아오지 못하고 목표물로 향해 곧바로 날아가듯이, 고대 사회에서도 축복은 언제나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것을 초기 이스라엘의 족장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축복관을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도 고대적인 축복관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나의 종교생활 여하에 따라서, 나의 신앙 연수나 경험에 비례해서 축복이 정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축복의 이니시아티브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3) 신약성서의 축복
신약성서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축복에 관한 하나의 메시지는, 마태복음 10장의 예수가 제자를 파송하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임명은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10:7)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선포라고 하는 수직적인 면과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신앙집단의 안녕이라는 수평적인 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은 구원이라는 콘텍스트 안에서만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건이란 콘텍스트 없이 축복이 있을 수 없고, 또 축복을 무시한 구속사건만의 주장은 인간 실존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성서는 이 두 가지 면을 우리에게 다 제시해 주고 있다.
(4) 교회생활 속의 축복
교회생활에서의 축복은 이와 같은 성서적 축복 개념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베스터만은, 목회자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일반적 성격을 띤 보편인에게 전할 수 없고, 특정인의 특수성에 맞도록 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지닌 제사장의 축복과 관련지어 구원선언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5) 맺는 말
축복개념은 성서 특유의 것이 아니며 고대 종교적인 개념이지만, 성서에서는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역사와 관련됨으로써 마술적인 요소가 배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생활내에서 발견되는 그릇된 축복 개념은 성서적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으로, 우리는 성서로 다시 돌아가 구속사건이라는 콘텍스트 안에서 축복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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