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約에 나타난 이스라엘 宣敎
1宣敎에 對한 舊約學的 接近
지금까지 宣敎에 對한 聖書學的 理解는 주로 宣敎가 聖經에 命令되었고(宣敎의 必然性) 委託되었다는(宣敎의 可能性) 事實을 證明하려고 努力하였으며, 宣敎 그 自體가 聖書神學的으로 무엇이냐는 데는 關心이 不足했다는 點이 오늘날 宣敎學과 聖書學의 만남의 問題로 指摘되고 있다.
이러한 問題意識에 對한 背景에는 그동안 宣敎에 對한 槪念의 變化가 重要한 作用을 하고 있음이 事實이다. 그러나 오늘날 宣敎를 爲한 聖書學的인 接近의 根本的 變化는, 聖經의 宣敎에 對한 몇몇 책이나 몇몇 句節들(舊約에서 아브라함의 召命句節이나, 요나書나, 이사야書에 나타난 世界 宣敎에 關한 句節들)에서 脫皮하여, 新舊約 聖經 그 自體를 ‘宣敎의 冊’으로 보아야 한다는 認識에서 出發한다. 그러므로 宣敎에 對한 舊約學的 接近은, 創世記부터 말라기까지의 經典的 文脈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歷史的 信仰과 啓示된 하나님의 말씀과 相關關係에서 “宣敎란 무엇인가?”라는 質問을 새롭게 提起하고 있다. 이러한 根本的 質問의 具體的 內容은, 1.敎會가 해야 할 宣敎의 根據와 動機는 무엇인가? 즉 왜 宣敎해야 하는가? 2.宣敎의 內容은 무엇인가? 또는, 宣敎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3.宣敎를 修行해 나가는 힘은 무엇인가? 4.宣敎의 窮極的인 目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들이다.
여기에 對한 適切한 應答을 爲한 聖經의 宣敎的 關心에 對한 硏究는 다가오는 21世紀에도 여전히 重要한 課題가 될것으로 展望된다. 그동안 聖書神學의 宣敎的 관심의 增加와 宣敎神學者들의 聖書硏究에 依해, 聖經的으로 敎會의 宣敎에 對한 바른 理解를 追究하는 傾向이 過去보다 活潑하게 된것은 어느 程度 事實이지만,舊約學的인 宣敎理解에 對한 硏究는 아직도 相當히 不足한 形便이다. 最近에 宣敎神學者 데이비드 보쉬가 21世紀를 向한 基督敎 宣敎를 爲해 聖經的인 宣敎의 模襲들을 살피는 자리에서 앞으로 宣敎學과 聖書學의 보다 緊密한 協同硏究를 提案하면서 舊約에 對해 宣敎學的으로 接近하는 立場을 다음과 같이 天命한 것은 注目할 만한 洞察이다. “舊約에 關해서는, 대체로 舊約은 歷史的으로나 文化的으로 特殊한 性格과 制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宣敎를 뒷받침하기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우리가 舊約의 바위나 자갈틈새를 仔細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宣敎的인 작은 純金덩어리들을 發見할 수 있다. 이를테면 異邦人 룻이나 나아만 이야기, 詩篇이나 제2이사야書에 나오는 世界史的인 信仰의 表現들,니느웨에 宣敎師로 派送되었던 豫言者 요나 이야기 等이다. 그러나 때로는 舊約의 鑛山은 當場 알아볼 수 있는 金덩어리를 내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런 舊約聖經의 鑛石들을 녹여서 宣敎를 爲한 金덩이를 抽出해내야 할 것이다. 이런 視覺에서 보쉬는 聖經에서 ‘宣敎의 뿌리찾기’ 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함을 强調하면서, 지금 가톨릭 學者들이 改新敎 學者들보다 이 方面의 硏究에 앞장서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1983年에 出版된 도날드 세니오르와 캐롤 스툴뮐러의 共著 <宣敎를 爲한 聖書的 基礎>란 冊이 아직까지 이 分野에서 最高의 硏究書籍이라고 疏開했다. 그러면서 宣敎學者로서 自身의 宣敎의 聖書神學的 構圖를 提示하였다. 이 글에서는 먼저 보쉬가 提示한 宣敎의 聖書神學에서 舊約과 關係된 主張을 要約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 다음 이러한 새로운 舊約에서의 宣敎의 뿌리찾기(舊約에서 宣敎란 무엇인가?)에 對한 몇가지 具體的 可能性들을 舊約學的인 立場에서 論議함으로써 舊約의 이스라엘과 宣敎에 비추어 본 오늘의 宣敎的 敎訓을 찾아보려고 한다.
II 舊約聖經과 宣敎
I. 舊約은 宣敎의 冊인가
1)보쉬의 舊約에 對한 宣敎的 理解
무엇보다 보쉬는 聖經의 斷絶된 證明 句節들을 모아 宣敎의 聖書神學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點을 分明히 하면서, 新舊約聖經에 一貫되게 貫通하고 있는 基本的인 네가지 宣敎 主題들을 聖書神學的 宣敎理解의 틀로서 提示했다.
첫째는 同情心(Compassion)이다. 舊約과 新約에서 共通된 宣敎의 基本的 動機는 하나님의 同情心이다. 하나님은 人間을 그대로 버려두고 지나가시기를 拒否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침내 自身의 獨生子까지 世上에 보내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同情心은 이미 이스라엘을 選擇하신 것에 잘 나타나 있다.(겔 16:4-7 參照). 出애굽 信仰告白의 前提도 하나님의 同情心이다.(출20:2) 舊約의 하나님은 무엇보다 疏外된 者와 孤兒와 寡婦의 아버지시며 保護者이시다(詩 68:5-6). 요나書의 要點도 바로 怨讐關係에 있는 니느웨 百姓과 그 짐승들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同情心이다. 요나書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과 같은 同情心을 갖도록 促求하는데 있다. 그 中心에 同情心이 있는 信仰은 眞實로 聖經的이며 宣敎的 信仰이라는 것이다. 聖書學的 用語로 보쉬가 말하는 同情心은 舊約 히브리語에서는 ‘헤세드’(申 7:7-8 ; 出 34:6 參照)이며, 新約에서 이 槪念은 ‘아가페’사랑으로 表出된다.
둘째는 殉敎的 證言이다. 앞에 言及된 宣敎動機인 同情心에서 受難(Passion)이 따라온다. 受難은 苦難과 殉敎까지 意味한다. 宣敎는 결코 勝利事業이 아니다. 聖書的 宣敎는 어디까지나 ‘軟弱함’속에서 隨行되는 것이다. 舊約의 이스라엘 歷史에서 이 事實이 分明히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强國이 될 때 宣敎的 次元이 弱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反面에 이스라엘이 勢力과 榮光을 喪失했을 때, 豫言者들은 宣敎的 次元이 이스라엘의 삶에서 무엇보다 重要하다는 點을 認識하였다. 그 한 例가 第二 이사야(사 40-55章)이다. 이사야書는 이스라엘의 國力이 無意味해졌을 때, 舊約의 宣敎思想이 高揚되었던 것으로 記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종(奴隸)이 되어야 하며, 選擇된 ‘主의 종’이 죽기까지는 代贖的인 苦難받음을 通해 이스라엘과 함께 많은 사람이 救援을 받는다. 主의 종의 使命은 말씀의 宣布뿐 아니라 他人을 爲한 代贖的 苦難을 意味한다. 이런 觀點에서 이사야 53章은 舊約宣敎思想의 最高의 絶頂과 가장 깊이 있는 次元을 同時에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舊約의 야훼(主)의 종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原形(豫表)이며(막10:45) 結局 예수 그리스도의 宣敎는 “自身을 비우는”(빌2:5-8 參照)使命이었다. 이러한 背景에서 볼 때, 바울의 世界 宣敎使役도 舊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즉 바울의 宣敎使役에서 軟弱함과 苦生, 그리고 苦難과 殉敎는 그의 宣敎的 삶의 核心的 單語들이다. 바울 宣敎의 秘密은 ‘十字架’라는 指摘이다(갈 6:14 以下 參照).
셋째는 하나님의 宣敎(Missio Dei)이다. 舊約은 宣敎의 實際 行爲者와 支持者가 하나님 自身이라는 點을 分明히 드러낸다. 이사야書의 “야훼의 종”의 宣敎는 하나님이 그 종에게 또는 그종을 通해 行하시는 것이지, 그 종이 하는 것은 아니다(사42:18-20;48:8-11 參照). 이와 같은 舊約의 하나님의 宣敎는 다음 두가지로 要約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自己 百姓을 救援하심으로 異邦民族들 앞에서 그의 榮光을 나타내시고, 이제 이스라엘을 通해 알려진 救援의 빛을 바라보고 黑暗 中의 다른 民族들도 하나님께 나오게 하신다. 둘째는 宣敎가 하나님의 行動이라고 强調하는 것은 結局 人間偏의 宣敎活動을 弱化시키는 이 아니라 오히려 그 反對로 宣敎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百姓은 그 일에 더욱 沒頭하게 된다는데 있다는 意味가 있다. 그러나 舊約의 이스라엘은 異邦人들의 救援은 終末에 異邦民族들이 예루살렘으로 巡禮하기 爲해 찾아들 때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活潑한 宣敎活動에 參與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사2:2-3參照). 보쉬는 初代敎會의 유대人 基督敎人들이 異邦人 宣敎에 消極的이었던 것도. 舊約의 終末論的 하나님의 宣敎이기 때문에 人間的으로 異邦人들에게 예루살렘 巡禮를 再促하는 것은 神聖冒瀆이요 人間的인 驕慢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舊約의 하나님의 宣敎思想을 歪曲한 解釋에서 온 것으로 본다.
넷째로 舊約의 歷史(History)理解이다. 舊約에서 歷史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人格的 關係性의 內容이다. 그런데 그 關係性의 具體的 實體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選擇이다. 舊約에서 選擇의 主題는 世界史的 宣敎 主題와 反對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實際로 그 選擇은 모든 人類를 爲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選擇하고 그에게 召命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通해 땅 위의 모든 族屬이 福을 받기 위함이었다.(創12:1-3). 이스라엘 歷史에서의 奇蹟은 거듭해서 야훼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서 그가 意圖했던 대로 사람을 罰하지 않으시고, 救援의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點이다(렘18:5-12 參照). 舊約의 歷史는 야훼 하나님이 永遠한 循環의 틀(自然界의 循環처럼 歷史는 權益을 爲한 鬪爭으로 永遠히 循環한다는 自然宗敎들의 歷史理解)을 깨고 이스라엘과 함께 未來로 나가시는 救援史를 펼쳐보이시는 것이다. 이러한 歷史的 特殊性은 新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오직 歷史的 宗敎만이 眞實로 宣敎的일 수 있다는 主張이다. 보쉬는 위에서 言及한 同情心, 殉敎的 證言, 하나님의 宣敎, 이스라엘의 歷史理解가 聖書的인 네가지 ‘宣敎的 動因들’로서, 이것들은 內的으로 서로 連結되면서 相互依存的인 關係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觀點에서 우리는 보쉬와 함께 舊約은 그 全體的으로 ‘宣敎의 冊’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2) 스툴뮐러의 宣敎를 爲한 舊約의 基礎들
스툴뮐러는 舊約의 메시지를 通한 世界宣敎의 基礎들과 그에 根據한 오늘날 敎會의 宣敎使命을 바로 理解하기 爲해서는 이스라엘 信仰의 形成過程을 歷史的으로 把握해야 하며, 그 過程에서 어떻게 初期의 個體的이며 排他主義的 性格(또는 求心的 性格)이 普遍主義的 性格(또는 遠心的 性格)으로 바뀌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重要하다고 前提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던 때에 無에서부터 이스라엘을 創造하심으로 이스라엘의 信仰이 始作되게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人類가 이미 數千 年 혹은 數百萬 年을 存在해온 以後에 이스라엘을 選擇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信仰歷史는 언제나 그 初期段階에서 이스라엘의 世俗的 經驗에서 出發한다는 點이 特徵이다. 이스라엘은 世俗歷史 속에서 生存과 關係된 世俗的 事件들을 經驗하게되고, 그 世俗的 經驗은 世俗的 記憶으로 連結된다. 그 代表的인 經驗이 애굽에서의 奴隸들의 脫出事件과 가나안에서의 農奴들의 蜂起事件이다. 初期 하비루(아피루)들의 世俗的 解放經驗과 그 經驗에 對한 特殊한 傳承(世俗祝祭를 通한)은 이스라엘 信仰의 指導者인 모세나 信實한 야훼 信仰人들을 通해 야훼 하나님과의 救援史的 歷史이야기로 發展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歷史的 信仰의 發展過程은 예루살렘의 거룩한 시온神學에서도 確認되며(그것은 처음에 여부스族에게서 빼앗은 다윗城이었다). 그後 預言者들의 메시지들은 이웃 異邦나라의 世俗的 宗敎文化와 世俗政治, 經濟的인 經驗과의 避할 수 없는 만남과 그 結果에 對한 省察을 通해 普遍的 信仰의 再解釋으로 나타난다. 主前 8世紀 호세아 預言者가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關係를 男便과 아내의 關係로 再解釋할 수있었던 것도 自己 아내의 不倫과 그로 因한 子女들의 出生에 對한 疑心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苦痛의 背景을 이루고 있는 當時 가나안 文化의 豊饒宗敎禮式인 ‘거룩한 結婚’에서 새로운 豫言者的 洞察力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周邊 國家들에 對한 이스라엘의 排他的 經驗을 克服하고 異邦의 帝國들이 이스라엘을 侵略하고 滅亡시키는 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깨끗케하시고 變化시키시는 道具로써 使用하시기 때문이라고 再解釋하게 된 것도 世俗的 世界 列强의 侵略經驗의 苦痛에서 비롯된 이스라엘 信仰의 普遍的 再解釋의 實例로 提示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다윗王朝의 成立史나 솔로몬의 예루살렘 聖殿制度의 確立도 이스라엘 信仰의 새로운 歷史的 段階들에서의 避할 수 없는 土着化 過程의 産物이며, 一段 土着化된 다윗王朝의 神學과 예루살렘 聖殿神學도 다른 舊約의 主題들과 함께 다시 이스라엘 信仰의 指導者들(주로 預言者들)에 依해 이스라엘 中心思想 一邊倒에서 벗어나 普遍史的 觀點에서 再解釋되어진 것이 이스라엘 歷史의 宣敎的 性格의 核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舊約의 歷史內在的 宣敎의 性格을 스툴뮐러는 “世俗文化(他民族들의 歷史的-個別的인 하나님 經驗)의 收容過程”(Acculturation)으로 부른다.
스툴뮐러는 아브라함에서부터 始作하여 新約의 그리스도의 오심 直前까지 이스라엘 歷史를 크게 6段階로 區分하였다. 이 모든 段階를 考察한 後 程度와 主題의 差異는 있을지라도 一貫되게 이스라엘 信仰에서 ‘文化收容’의 歷史的 過程이 確認되며, 그것은 언제나 3段階的 發展을 거친다. 즉 世俗的 事件의 挑戰과 葛藤(出애굽, 가나안 征服, 다윗王朝, 예루살렘聖殿, 바벨론 捕虜 等). 世俗的 事件들의 長期間에 걸친 土着化, 土着化된 이스라엘 信仰에 對한 普遍史的인 再解釋으로 發展한다고 把握하였다.
舊約의 이스라엘 信仰은 그 出發自體가 世俗事件과 周邊 異邦民族들과의 關係 속에서 始作되고 形成되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스툴뮐러는 (舊約)聖書의 깊은 洞察力들과 强力한 象徵들은 異敎徒 百姓들로부터 借用되거나 共有되었으며, 聖書의 主題들 가운데 宗敎的 經驗의 普遍的 性格,創造世界에 나타난 하나님의 啓示, 福音에 應答하는 異邦人들의 能力, 하나님과 그의 靈의 活動은 언제나 人間 期待穉의 範圍를 넘어선다는 歷史的 經驗들은 非基督敎 宗敎들과의 肯定的 連結고리들을 提示하는 聖經的 資料들이라고 한다.그리고는 (舊約)聖經이 말하는 世界宣敎의 基礎를 첫째 하나님의 世界史的 統治主權, 둘째 救援의 普遍史적 性格(어느 民族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 셋째 創造神學, 넷째 個人과 共同體的인 信仰體驗으로 定理하였다. 以上의 文化受容的인 틀에서 舊約歷史에 對한 理解는 分明히 舊約全體가 ‘宣敎의 冊’이라는 洞察力을 갖게 할 만하다.
그러나 스툴뮐러의 宣敎的 舊約歷史 理解는 로마 天主敎 神學者로서 第二次 바티칸 共議會의 宗敎 包容主義 立場을 이스라엘 歷史에 代入하여 解釋하는 偏頗性과 이스라엘 歷史를 事實歷史(Historie)와 區分되는 救贖史(Heilsgeschichte, 믿어진 歷史)로 解釋함으로써 信仰的 葛藤을 불러일으키는 點이 念慮된다. 또한 舊約의 이스라엘 歷史를 歷史內在的인 經濟, 政治, 文化的인 因果關係에서만 그 發展過程을 追跡함에 따라 啓示依存的인 思考와 하나님의 世界史的인 救援의 道具로써 이스라엘의 ‘媒介性’이 가지는 重要한 意味가 弱化되는 點도 問題이다. 뿐만 아니라 宣敎의 內容과 目標도 人間化와 人間相互間의 理解增進을 通한 平和思想에 强調點을 두고 있는 印象을 强하게 준다.이것은 오늘날의 現場化 宣敎神學의 傾向을 反映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人間의 墮落을 問題삼는 舊約의 罪問題를 宣敎的 次元에서 疏忽히 다루는 點과 人間의 諸般 文化들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사탄의 活動을 注視하는 洞察力이 未洽한 것이 아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冊에서 “宣敎란 自身의 信仰的 體驗과 識見을 確認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라는 하나님의 命令(부르심)이다. 그 나눔은 먼저 自身이 속한 共同體와 傳統속에서 이루어지며 나아가서는 자신과 다른 文化的,社會的,宗敎的 傳統을 지닌 사람들과 共同體 속에서도 이루어진다.이렇게 함으로써 基督敎人들은 人類가 사랑과 尊敬 속에서 뭉쳐진 하나의 백성으로 하나님 自身의 生命을 具現하라고 敎會에 委託하신 하나님의 委任 命令을 隨行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宣敎가 雙方通行임을 意味한다. 信仰이란 强要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라는 것이다. 그래서 宣敎師는 男女를 不問하고 그가 보내심 받은 사람들과 文化속에서 이미 歷史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救援을 發見함으로써 배우고 더욱 깨닫게 될것이다.”라고 말하는 스툴뮐러 나름대로의 舊約宣敎의 뿌리찾기 理解를 批評的으로 受容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舊約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特殊한 歷史的 ‘媒介體’를 普遍史的 救援의 求心性으로 確認하고 있으며(요 4:22 參照). 이스라엘을 通한 하나님의 宣敎歷史는 人間化를 通한 서로의 나눔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出애굽과 시내山 契約, 가나안 征服戰爭, 波瀾萬丈한 이스라엘의 王國歷史, 그리고 王國滅亡의 엄청난 悲劇과 바벨론 捕虜의 經驗들을 通하여,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告白할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軟弱性’을 通해 이루어졌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3) 舊約文書의 宣敎的 性格
舊約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啓示와 참 하나님에 對한 信仰은 萬人을 爲한 것이다.
舊約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世上에 보내신 同一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히 1:1-3), 오늘도 人間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救援에 이르게 하는 知慧를 준다(딤후 3:15).
먼저 모세五經은 참 하나님에 對한 信仰과 人間에 對한 올바른 理解를 可能케 한다는 點에서 宣敎的이다. 五經의 重要한 主題들인 하나님의 創造와 人間의 犯罪와 墮落, 아브라함의 選擇과 族長들에 對한 하나님의 約束, 出애굽과 시내山 契約, 그리고 이스라엘 禮拜共同體의 出現과 廣野에서의 訓練, 申命記的인 順從으로써 하나님에 對한 이스라엘의 사랑은 舊約의 宣敎思想의 骨格을 이루는 基本的인 要素들이다. 特히 五經은 宣敎的 觀點에서 올바른 信仰의 知慧를 强調하며(申 4:6 參照), 十誡命의 두돌판은 萬人을 爲한 宣敎의 憲章이라고 할 수 있다.
豫言書는 前期豫言書(여호수아-列王記上下)와 後期豫言書(이사야-12小先知)로 區分한다.
前期豫言書는 하나님 나라의 共義(체데크)를, 後期豫言書는 하나님 나라의 正義(미쉬파트)를 强調하는 點에서 그 宣敎的 特徵이 드러난다. 預言者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나비’의 意味는 하나님에 依해 ‘보내심을 받은 者’(또는 부르심을 받은者)로서 舊約의 本格的인 宣敎歷史는 預言者 사무엘 때로부터 始作된다고 볼 수 있다.
舊約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選擇과 言約의 救贖史는 한마디로 땅 위의 모든 族屬을 救援하시기 爲한 하나님의 世界宣敎的인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으며(行 3:24-26 參照). 舊約의 預言者들이 公義를 强調하기 爲한 것은 歷史的 이스라엘이 世界民族들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關係에서 맡겨진 ‘祭司長 나라의 使命’의 誠實性을 促求한 內容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預言者들의 正義에 關한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거룩한 百姓’으로서 世界民族들 가운데서 지닌 使命을 일깨우는 것이다. 公義의 具體的 內容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關係를 確認할 수 있는 十誡命의 첫째 돌판과 連結된다면 거룩한 百姓으로서 이스라엘이 行해야 할 正義는 둘째 돌판과 關係되는 內容이다.
舊約의 이스라엘 歷史는 대체로 하나님의 百姓이 共義와 正義의 宣敎的 使命을 堪當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豫言者들을 排斥하였고 오히려 거짓 豫言者들이 登場함으로써 滅亡의 길을 再促했던 歷史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北王國 이스라엘과 南王國 유다의 滅亡은 宣敎的 使命을 實踐하지 못한 데서 그 原因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러한 脈絡에서 바벨론 捕虜期 以後에 豫言者들이 異邦民族들에 對한 이스라엘의 宣敎비전을 새롭게 强調한 것은 異常한 일이 아니다.
舊約時代 마지막 預言者 말라기는 第二 聖殿時代에 또다시 漫然하기 始作한 이스라엘 信仰의 墮落을 質責하면서 舊約에서 異邦宣敎에 對하여 가장 넓은 地平을 열어놓았다.(말 1:11). 케투빔의 舊約神學的 主題는 하나님의 創造秩序 속에서 이스라엘 百姓의 生活의 知慧를 다루고 있으며, 이 땅의 現實 歷史속에서 幸福된 삶을 追求하고 福된 삶을 通한 宣敎的 使命을 일 깨우는 것이다. 먼저 詩篇은 이스라엘 禮拜共同體 信仰生活의 知慧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으며, 宣敎와 함께 注目되는 것은 주로 帝王詩篇들(詩 47; 67; 72; 93; 96; 97; 98; 99 等. 比較 詩117; 138:4-5; 148:11-13 等)로써 야훼 하나님의 全世界的 王權統治를 讚揚하며 異邦民族들을 讚揚에 同參토록 招請하는 것이 그 特徵이다.(代上16:23-24 比較). 또한 시온 詩篇들도 8世紀 이사야(사2:2-5)나 미가(미4:1-3)豫言者들의 시온神學을 反映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聖殿이 있는 시온山이 全世界 民族들의 聖所가 되고 모든 民族들이 예루살렘 聖殿으로 禮拜하러 모여 든다는 꿈(Vision)을 나타내고 있다.(詩 46; 48; 68; 76; 84; 87; 122; 132等). 이것은 이스라엘 信仰이 生活속에서 萬人을 爲한 것으로 確認될 때 그 참된 意味가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證據이다. 詩篇에서 多數를 차지하는 歎願詩에도 이스라엘은 苦難中에 있을 때조차 孤立되지 않고 苦難받는 異邦民族들과의 連帶性을 보여줌으로써 舊約 이스라엘 信仰生活의 宣敎的 性格을 드러내고 있다(詩 22:26-31). 욥, 箴言, 傳道書를 中心하는 知慧文學은 創造神學을 바탕으로 世界的이며 普遍的인 人間의 生活哲學을 主題로 取扱한다는 點에서 이스라엘 이웃에 있는 異邦民族들과의 橋梁 役割을 하는 宣敎的 性格을 드러내고 있다. 人間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創造秩序속에서 올바른 삶(成功的인 삶이 아니라)을 살 수 있게 하는 能力인 知慧를 얻게 하는 舊約 知慧로의 招請은 누구에게나 開放的인 性格을 가지고 있다는 点에서 또한 宣敎的이다. 이러한 舊約의 知慧는 方法論的으로 敎育을 通해 傳達되는 것으로 宣敎에서 敎育의 重要性이 强調된다고 볼 수 있다. 舊約黙示文書의 代表的인 冊으로 指摘되는 다니엘書에는 主人公 다니엘과 그의 세 親舊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 帝國의 王宮과 메대 페르시아의 宮中에서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證據한 宣敎師들로 나타난다. 그런데 다니엘書에서 舊約의 하나님 나라 思想은 새로운 局面을 나타낸다. 그것은 豫言者的인 終末論에서 나타나는 歷史의 延長線上에서 이루어질 새하늘과 새땅의 Vision이 아니라 窮極的인 惡의 勢力에 勝利하고 하나님께로부터 統治權을 받은 人子(the Son of Man)가 다스리는 宇宙的이며 超越的인 나라로서 ‘모든 百姓과 나라들과 各 方言하는 者’가 모두 그 나라를 섬기게 되는 黙示的 終末論의 Vision(단 7:13-14; 마 25:34 比較) 나타난다. 豫言者的인 終末論과 黙示的 終末論은 언제나 異邦民族들의 將來에 對한 關心을 包含한다는 共通性을 나타내며 亦是 宣敎的 性格을 分明히 하고 있다. 以上에서 살펴본 대로 舊約은 全體的으로 ‘宣敎의 冊’의 模襲을 드러내고 있다. 舊約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온 創造世界와 모든 人類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舊約에서 본 宣敎의 基礎
宣敎의 冊으로서 舊約의 性格은 무엇보다 舊約에 나타난 하나님 理解에 根據한다. 舊約神學에서는 一般的으로 하나님에 對한 理解를 여러가지로 啓示된 하나님의 이름들에 對한 考察을 通해 定理하고 있다.
(1) 歷史的으로 가장 옛스런 하나님의 이름은 엘(El)로 나타난다. 엘은 舊約에서 異邦神을 指稱하기도 하지만(出 34:14; 말 2:11 等)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使用된다(민 12:13 ; 사8:8 等).엘은 嚴格히 말하면 셈族 一般의 神槪念을 表現하는 普通名詞이며 古代 가나안 多神敎宗敎에서 萬神殿 主神의 名稱으로 나타난다. 가나안의 주신 엘은 모든 것의 創造者요 王이며 同情과 慈悲를 베푸시는 거룩한 분으로서 황소의 形象으로 表現된다(出 32:4 ; 王上 12:28 比較). 舊約의 엘 하나님 名稱은 定冠詞로 限定되거나(創46:3; 시85:9) 修飾語가 붙는 것을 볼 수 있다(創 14:18 엘앨욘; 創17:1; 出6:3 엘샷다이; 創16;13엘로이; 創21:33 엘올람, 그리고 벧엘, 사무엘, 임마누엘, 이스라엘 等이 있다). 舊約에서 엘 名稱은 略230回 使用된다. 이스라엘 信仰이 理解한 엘 하나님은 무엇보다 ‘너희 祖上의 하나님(엘)’의 文脈에서 그 特徵이 드러나고 있다.(創46:3; 49:25).엘은 이스라엘 祖上들이 믿는 神의 名稱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은 엘샷다이(全能하신 하나님)로 알려진다(創35:11;出6:3).엘 샷다이는 이스라엘 信仰에서 마치 父母님과 같은 神이다. 샷다이라는 히브리어 單語는 어머니의 젖가슴이라는 意味를 가진다고 보고 舊約 하나님의 女性的 意味를 가진다고 보고 舊約 하나님의 女性的 이미지를 나타내는 神名稱으로 생각하는 學者들도 있다. 이스라엘 信仰은 셈族 文化圈에서 祖上神의 名稱을 共有함으로써(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이름에서부터) 舊約信仰의 普遍性과 함께 舊約宣敎神學의 基礎를 磨鍊하고 있다.
(2)엘과 함께 보다 자주 略 2600回 程度 나타나는 舊約의 하나님 이름이 엘로힘(Elohim)이다. 確實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엘이 가나안語에서 由來한 名稱이라면 엘로힘(엘로아흐)은 아람語 背景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申 26:5 以下 參照; 수24: 15 比較). 엘로힘의 複數用法은 大部分 異邦神들을 指稱하며(出20:3; 創35:2; 수24:20; 申5:7 等) 이스라엘의 하나님 엘로힘은 定冠詞로 限定되거나 單數用法으로 나타난다(創1:1; 王上 18:39 等). 엘로힘도 엘처럼 셈族 文化圈에서 共通的으로 使用되는 神名稱인데 舊約 文脈에서는 엘로힘도 엘처럼 셈族 文化圈에서 共通的으로 使用되는 神名稱인데 舊約文脈에서는 엘로힘이 創造主로서 强調되었고(創1:1-2:3 까지 무려 35回 反復됨). 舊約 文脈에서는 一般的으로 人間을 包含한 被造物과 區別되는 神聖을 强調하는데 그 特徵이 있다(詩8:6; 삿9:13 等 參照). 이스라엘 信仰이 漸次 엘로힘의 單數用法을 固執한 것은 創造主 하나님의 唯一神 思想을 意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엘은 ‘하느님’으로 엘로힘은 ‘하나님’으로 區別해서 飜譯하는 것이 必要하다고 생각한다. 엘로힘은 知慧로써 萬物과 人間을 創造하셨고 온 人類의와 被造界를 다스리신다.(詩104:24).따라서 이스라엘 信仰의 엘로힘 理解는 創造神學을 바타으로 全世界的이며 被造界를 包括하는 普遍性을 나타낸다.이런 意味에서 舊約의 메시지는 總體的으로 確固한 世界宣敎的 基礎에 根據하고 있다고 하겠다.
(3)엘과 엘로힘보다 舊約의 하나님을 核心的으로 代表하며 약600回로써 가장 많이 使用된 이름이 하나님의 固有名詞인 神名4文字(여호와, 야훼)이다(출3:14-15 參照). 야훼는 엘과 엘로힘의 屬性을 包括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强調된다(수22:22; 詩50:1 參照). 무엇보다 이스라엘로 代表되는 人類의 歷史에 介入하셔서 人間의 歷史속에 臨在하시며 行動하시는 하나님으로 紹介된다(出34:5-7). 特히 舊約信仰의 核心을 이루는 出애굽 事件을 通하여 야훼 이름의 歷史的 主權과 世界史的인 王權統治의 性格이 强調된다(출15:18,21). 그러므로 “야훼의 이름을 안다”는 熟語는 하나님의 救贖史적인(審判까지 包含된)王權統治를 歷史的으로 體驗하는 것을 意味한다(出6:7;7:5; 겔29:21; 30:25-26 等; 요17:26 參照). 야훼의 이름은 그러므로 엘과 엘로힘과 連帶하면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唯一神으로서의 世界史的 王權統治 主權을 强調하는 것이 特徵이다. 이스라엘 禮拜共同體는 이러한 根據에서 야훼 이름을 다음과 같이 거듭해서 讚揚해 마지 않는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讚揚하며 너희 모든 百姓들아 저를 稱頌할지어다 우리에게 向하신 여호와의 仁慈하심이 크고 眞實하심이 永遠함이로다 할렐루야”(詩117:1-2) 여기서 우리는 야훼의 이름을 通한 이스라엘 信仰과 舊約메시지의 性格이 世界史的이며 萬人을 爲한 分明한 宣敎的 基礎 위에 있음을 다시금 確然히 보게 된다.
(4)以上의 세 가지 하나님 이름 外에 舊約 豫言書에서는 獨特한 ‘萬軍의 여호와’(야훼 츠바오트)란 呼稱이 略280回 程度 나타난다. 萬軍의 여호와란 이름은 五經이나 여호수아, 士師記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고 이스라엘 歷史에서 本格的인 豫言活動이 始作되는 사무엘書의 序頭에서 비로서 使用되기 始作한다(삼上1:3,11). 이 이름은 주로 預言者들인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 文脈에서 活潑히 使用되며, 詩篇에서도 나타난다(詩24:10; 46:7; 48:8 等). 舊約學者들은 츠바오트(萬軍)의 解釋에 따라 두가지 見解를 나타낸다. 먼저 ‘萬軍의 여호와’는 舊約文脈에서 주로 戰爭과 關聯되어 使用되었다(삼上17:45 參照). 하나님이 이스라엘 百姓을 ‘내 軍隊’(出7:4 나의 츠바오트: 12:41 比較)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萬軍의 여호와 名稱은 이스라엘을 爲해 앞장서 싸우시는 ‘戰爭의 神’으로 理解하여야 한다는 主張이다(詩24:8 以下 參照). 그러나 앞서 言及한 대로 萬軍의 여호와 이름이 出애굽 以後 士師時代까지 이스라엘의 거룩한 戰爭의 文脈에서 단 한번도 使用되지 않았고(民21:14 參照).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와 聯關된 文脈에서 처음 使用되기 始作한다. 이것은 戰爭의 神의 이름으로 斷定키 어려운 點이다. 詩篇24篇에서도 萬軍의 여호와는 單純히 戰爭의 神이 아니라, “땅과 거기 充滿한 것과 世界와 그 中에 居하는 者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라는 前提와 함께 榮光의 王이며 世界의 하나님으로 紹介된다. 이러한 萬軍의 여호와 이름이 宇宙的이며 全世界的인 하나님 理解를 强調하는 것이라는 主張을 뒷받침하는 證據로는 ‘츠바오트’의 內容이 被造界의 萬物을 가리키며(創2:1 參照). 여호와는 그 寶座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政權으로 萬有를 統治하시는 文脈에서(詩103:19 參照)찾아볼 수 있다. 츠바오트는 또한 天軍(詩103:21)으로 理解되며 日月星新과 靈界의 存在들을 包含한다(詩89:6-8; 詩148:2; 단7:10 比較). 그러므로 주로 預言者들이 理解한 하나님 名稱으로 나타나는 ‘萬軍의 여호와’는 怨讐를 물리치시는 戰爭의 하나님이라는 意味와 함께 이스라엘만을 爲한 守護神이 아니라 世界的인 하나님으로서의 一體兩面性의 意味를 지니는 것으로 預言神學의 意圖를 나타내는 獨特한 用語로 볼 수있다. 特히 주전 8世紀 이후 이스라엘 信仰이 偏狹하고 排他的인 選民思想으로 歪曲되는 現象이 나타나고(암9:7 以下 參照) 바알宗敎를 비롯한 이스라엘 周邊의 不道德한 偶像宗敎들의 勢力이 이스라엘의 生存을 威脅해올 때 預言者들은 이에 對處하는 메시지를 宣布하면서 萬軍의 하나님의 名稱을 效果的으로 使用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렘10:1-16). 萬軍의 여호와 이름의 宣敎的 意味는 不道德하고 하나님의 百姓의 生存을 威脅하는 異邦民族들의 罪에 對한 唯一神 야훼 하나님의 審判宣言이며(암1:3 以下 參照) 또한 하나님의 百姓 이스라엘의 歪曲된 排他性과 選民思想에 對한 宣敎的 挑戰이기도 하다. 舊約에서 發見되는 모든 宣敎思想은 以上에서 論議된 하나님 名稱들에 나타난 하나님 理解에 基礎한다고 하겠다.
3. 舊約宣敎의 目標
위에서 살펴본 舊約聖經의 總體的인 宣敎的 性格과 이스라엘 信仰의 하나님 理解에 根據한 宣敎的 基礎들을 가지고 우리는 舊約宣敎의 目標가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가늠해 보기로 하자. 舊約의 宣敎目標는 무엇보다 優先的으로 이스라엘 自身을 向해 놓여 있다. 이스라엘 信仰은 初期부터 活潑한 自己指向的인 宣敎宗敎라고 볼 수 있다. 모세가 애굽의 히브리 奴隸들에게 出애굽을 勸했을 때 그 目標는 表面的인 政治 經濟 社會的인 束縛으로부터 解放이 아니라 보다 깊은 次元의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信仰의 自由를 爲한 決斷을 促求한 것이었다(出4:22-23; 7:16; 8:1,20; 9:1,13; 10:7 參照). 出애굽 過程에서는 야곱의 子孫들만 아니라 ‘重多한 雜族’(出12:38 에래브라브; 民11:4 이스라엘 中에 ‘섞여 사는 무리’, 하아샆숲)이 함께 따라나왔다. 가나안을 向해 가는 길에서 舊約 宣敎思想 形成에 큰 影響을 준 歷史的 事件이 시내山 契約을 通해 나타났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血緣共同體에서 完全히 야훼信仰共同體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百姓과 맺은 세겜言約도 約束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宣敎的인 性格을 가지고 있음을 分明히 드러내 준다.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야훼信仰共同體 밖에 있던 사람들까지 包含하여 이스라엘 共同體가 야훼信仰으로 거듭날 것을 確約하고 있다.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舊約의 이스라엘은 더이상 血緣的인 아브라함의 子孫이 아니다(마3:9; 눅3:8 參照). 이스라엘은 이제 야훼信仰共同體로서 最初로 宣敎的 求心力을 갖추게 되었다. 이 求心力에 依해 가나안 征服過程과 그 以後 時代에 그 地域의 많은 異邦人들이 이스라엘 信仰으로 改宗하게 된다. 이스라엘 王國成立 以後 다윗王의 統治權은 가나안 地域을 掌握하고 南쪽은 아카바灣, 北쪽은 유프라테스, 西쪽은 地中海, 東쪽은 암몬과 모압 等 異邦地域으로 擴大되면서 이스라엘 信仰은 遠心的인 宣敎의 契機를 만나게 된다. 다윗의 親衛隊인 그렛과 블렛 사람들(삼下8:18; 15:18; 王上1:38 等)은 주로 外國人 用兵들이었고 다윗과 솔로몬의 七十餘年 統治期間을 通해 야훼信仰으로 改宗한 이들은 分明히 增加趨勢를 나타내었다. 솔로몬 時代에 特히 애굽이나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小아시아 地域의 周邊 强大國들과 交易과 人的交流가 活潑하였으며 自然히 이스라엘 信仰과 異邦人들과의 만남이 頻煩하게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다윗과 솔로몬은 各各 이스라엘 땅을 暫時 거쳐가는 外國人(노크리)이 아니고 이스라엘 百姓과 함께 領主하는 外國人 居住者(게르)의 成人男子 人口를 調査했으며, 솔로몬 時代 그 數字는 153,600名에 이르렀고 솔로몬은 이들을 예루살렘 建築에 動員했다(代下2:17-18; 代上22:2 參照). 이러한 歷史的 背景에서 솔로몬의 聖殿奉獻 祈禱文에 反映된 王國初期의 이스라엘의 信仰의 異邦人들에 對한 宣敎的 關心은 充分히 理解될 수 있다. “또 主의 百姓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者 곧 主의 이름을 爲하여 먼地方에서 온 異邦人(노크리)이라도 저희가 主의 廣大한 이름과 主의 能한 손과 主의 펴신 팔의 所聞을 듣고와서 이 殿을 向하여 祈禱하거든 主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異邦人(노크리)이 主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萬民으로 (콜 암메 하아레츠)主의 이름을 알고 主의 百姓 이스라엘처럼 敬畏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建築한 이 殿을 主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王上8:41-43, 代下6:32-33). 여기서 이스라엘 信仰은 外國人이나 異邦民族들이라고 해서 差別하지 않는다. 그 宣敎的 目標는 人間이면 누구나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行4:12 參考) 이스라엘과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普遍的인 하나님 나라의 指向性을 分明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建築한 예루살렘 聖殿은 이스라엘 民族이나 어느 團體나 個人 또는 祭司長 集團의 所有物이 아니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萬民을 爲한 聖殿이다. 聖殿을 中心한 이스라엘 信仰共同體의 宣敎的 目標는 預言神學에서도 再照明된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 聯合한 異邦人(네카르)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百姓 中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또 나 여호와에게 聯合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되며 安息日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言約을 굳게 지키는 異邦人(네카르)마다 내가 그를 나의 聖山으로 引導하여 祈禱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燔祭와 犧牲은 나의 壇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이는 내 집은 萬民(콜하암밈)의 祈禱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3-7). 요컨데 舊約宣敎가 指向하는 하나님 나라의 一體兩面性은 먼저 이스라엘 信仰共同體의 信仰的 決斷을 促求하는 不斷한 求心的的 性格과 이러한 求心性에 根據한 異邦民族들에 對한 差別없는 야훼信仰으로의 招請과 開放에 나타난 遠心的 性格의 調和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운이 “우리가 舊約 全體를 볼 떄 하나님과 人間, 人間과 自然과의 穩全한 秩序와 調和의 回復을 追求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舊約 全體를 貫通하는 Vision은 하나님-人間-自然萬物의 穩全한 回復과 調和의 實現이고 그것이 宣敎인 것이다” 라고 한것은 適切한 洞察이다. 따라서 舊約의 宣敎的 目標가 達成된 狀態는 하나님의 百姓으로서 이스라엘의 福된 삶이며(創12:2-3 參照)그 福은 다른 것이 아니라 信仰(禮拜)生活을 通해 世上이 줄 수 없는 幸福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詩1:1-3; 23;150 等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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