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학(舊約學)

구약에 있어서의 부와 가난

솔석자 2018. 12. 15. 13:20

구약에 있어서의 부와 가난

 

도널드 E 가우언

 

   포로기 이후의 초기 유대 공동체(BC 518)에 속해 있던 스가랴는 예루살렘 멸망과 바벧론 유수의 원인들을 돌아보면서, 아래와 같은 한마디로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설명들(cf 7:7) 을 요약할 수 있었.

   "진실한 재판을 행하여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7:9-10)


   우리는 이 문장이 그 선지자들의 사회적 메시지에 대한 적절하고 간결한 요약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건전한 사회의 특성에 대한 구약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그러한 사회에 대한 능동적인 면들은 여기서 다음 세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

  공의 (미쉬파트),(헤세드), 긍휼(라하밈).


  그러나 이것들은 요약적인 것들이다.

  스가랴의 요약은 구약 나머지 부분의 풍조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특히 그는 네 집단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주신 기준(토라7:12)에 따라 사는 건전한 사회가 될 때, 그 가운데는 과부들과 고아들, 나그네들, 그리고 궁핍한 자를 압제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표준은 구약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된 사회적 정의의 본질에 대한 정수이다.(그리고 그것은 신약에서도 야고보서 127절에 나타나고 있). 개인들은 그들이 과부들과 고아들, 그리고 나그네들을 어떻게 대하였는가에 의해 의로운가 혹은 악한가가 판단될 수 있으며 (, 31:16-32,94:6) 사회의 건전함은 이러한 집단들이 그 사회 가운데서 얼마나 잘 대접받는가에 의해 판단될 수 있다. (, 22:7)

 

  스가랴가 여기서 사용한 동사 (아사크) 는 때로 "압제하다"로 번역되지만 때로는 특별히 경제적인 곤궁과 관계있는 "압제하다"나 혹은 "강탈하"라는 좀더 명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점은 구약이 부와가난에 대하여 무엇이라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를 이 본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은 ''라는 어휘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에는 덜 관심을 둔 채, " "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들의 연구를 통해서 행해져 왔다. 이것은 적절한 것인데, 왜냐하면 구약은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하여 좀 더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지역에서의 과부와 고아의 위치에 대하여 좀더 특별한 연구들을 첨가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 대한 뛰어난 사전 해설들이 많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부와 가난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들에 대한 접근으로서, 이 세 집단들에 대한 구약의 특별한 관심을 고찰해봄으로써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하리라 보여진다. 진실로, 우리는 구약 문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접근을 강요하기 보다는 이스라엘 자신의 사고 방법을 통하여그것이 우리를 이끌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가난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곤경이다. 그러나 가난에 덧붙여 여러 이유들 때문에 힘이 없었던 어떤 집단들이 있었다. 생존을 위하여 인간의 근육의 힘에 크게 의존했던 사회에서는, 남자 어른이 하나도 없고 과부와 그녀의 아이들만으로 구성된 가족은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들의 곤경은 전혀 비자의적인 것이었으며 한 죽음의 결과였다. 그리고 구약에서와 같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우가리트 문학에서도 과부와 고아의 곤경에 대하여 언급되어질 정도로 그것은 고대 근동에 있어서 상당히 보편적인 문제였다.

   그 사회 구조들은 그들을 철저히 공격받기 쉽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에 이러한 각각의 문화들 속에서는 정의의 신과 왕들이 그들을 돌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고대 근동지역의 다른 문화권들의 문서들 속에는 이방 거주자들에 대한 어떤 유사한 언급도 없는 반면, 구약에서 "나그네"는 상당한 보살핌을 받는다. 이들은 본래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에 근거를 둔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그네들은 과부들과 고아들과는 달리 그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그같은 생활을 했으며, 종종 건장한 남자인 남자 어른에 의해 이끌어지는 한 가족의 구성원이었다. 이렇게 과부들이나 고아들이 되는 것은 거절할 기회를 가졌지만, 그들이 본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환경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특히 그것이 "불법" 이라는 말로 한정될 때, 즉시로 우리에게 나그네들이 이스라엘로 한정될 때, 즉시로 우리에게 나그네들이 이스라엘서 직면한 어떤 문제들을 짐작케 한다.


  "이민자들"이 아마도 '게르'(ger) 라는 말에 대한 가장 적절한 현대적 번역이라고 여기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전적인 표현은 W 로버트슨 스미스가 말한 바와 같다. "다른 족속이나 다른 지방의 사람으로서, 그 자신으로서는 힘을 쓸 수 없는 곳에 체류하며, 그 자신을 어떤 씨족의 보호나 힘있는 족장 아래 맡기는자".

   스가랴에 의하면 과부, 고아 , 그리고 이민자들은 가난한 자들에 속한(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19"10,23:22,29:12-13:10:2) 그들은 가난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가장 가난한 자들이곤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평범하고 가난한 이스라엘 성인 남자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부와 고아들은 사회적 구조 (남성이 지배하는), 나이, 그리고 육체적인 힘의 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호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민자들은 또한 자연히 그 사회적 구조와 연관이 전무하였고, 또한 풍습들과 억양 등에 있어 확실히 달랐을 것이기 때문에 호의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통에는 가난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25:47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그들이 가난해지는 것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더 쉬운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을 속이는 것이 매우 쉬웠으며 그들이 선택할 여지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엇을 가졌으며, 무엇을 필요로 하였는가에 관한 특별한 구약 자료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과부, 고아 그리고 이민자에 의해 표현되는 세 가지 다른 형태의 어려움에 대해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과부는 갑작스럽고, 비계획적이며, 원치 않는 확실에서 불확실에로의 운명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이다. 고아들은 그들의 육체적인 상태 때문에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민자들은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소속되지 못한"사람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러한 집단들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문화 속에서도 그와같은 것들을 발견함으로 그들의 고난을 좀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예를들면, 명성있는 직업에서 실직으로의 변, 혹은 육체적인 미성숙보다는 정신적인 무능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하는 무능). 그렇지만 구약저자는 이러한 점에 머물지 않는다.

 

  이러한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힘없음과 그로 인한 결과들이다. 지위도 없고, 고려해 주지도 않기에 쉽사리 힘있는 자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들이 가졌던 것: 과부의 문제는 만일 그녀가 사별후 즉시 재혼을 한다면 제고딜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아비가일, 삼상 25:40-42, 밧세바 삼하 11:26-27). 그렇지 않고 만일 그녀가 살아있는 남자 친척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자기 아버지 집의 보호아래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말 창 38:11,제사장의 딸들, 22:13). 수혼을 했을 경우 그녀는 처음 남편의 집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25:5, 38:8)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서는 과부 신세가 면해지기 때문에 그 문제는 사라졌다. 학자들 간에는 한 여자가 그녀의 남편의 소유를 상속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기도 하지만, 과부들이 그들 스스로의 소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다.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15:25) 잠언 2310절에도 나와있듯이, 실히 고아들은 유산을 받을 수 있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우리는 사무엘상 179-24절과 열왕기하 41-4절에서 그들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과부들을 보게되며, 욥기 243절에서는 과부들과 고아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축에 대한 언

급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남편이나 아버지의 죽음이 반드시 그의 가족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재산들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과부는 또한 확실한 법적인 권리들과 의무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윗에게 그녀의 청원을 가지고 나갔던 과부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듯이 재판을 청구할 권리가 있었다. (삼상 14:5) 결혼한 여자의 맹세가 그녀의 남편에 의하여 무효화될 수 있는 반면, 과부는 확실한 독자적인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맹세가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30:9).

   이방인이 과연 현실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는가하는 여부와, 한 소유했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하는 것은 분명치 않다. 확실히 그들의 처음 이스라엘에 거할 때에는 유산이 전혀 없었으며, 심지어

그들이 살 장소를 위해서도 어떤 땅을 가진 사람에게 완전히 의존해야만 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백성이 되기를 소원하는 이방인을 동화시키려는 경향이 율법에 강하게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들은 재산에 관해서라기보다는 의식적인 공동체로의 참여를 더 강조하고 있다. 포로기 이전 시기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

니라" (12:49,24:22, 15:15-16,19:33-34) 라는 제사법에서의 반복되는 강조와, 모든 전통적인 유산들은 포로기 때문에 파괴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포로기 이후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 영토내의 영구적인 거주가 커다란 장애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게 된다. 율법은 이방인들의 번영의 가능성을 고려하기는 하지만 ("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부요하게 되고..." 25:47), 우리는 본래 이방인었던 사람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워모으기 법은 들이나 포도원, 혹은 나무에 남겨진 것이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19:10).

이것은과부,고아,이방인들이 가졌던 것에 대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제한된 정보이다. 구약은 그들의 필요들에 대하여 더욱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 : 때로 과부, 고아, 이방인은 그들이 살아가기에 부족한 수입을 가졌음에 틀림없는 데, 처음 두부류는 충분치 못한 그들의 근육의 힘때문이었고, 나중 한부류는 불공평한 기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세가지 법적인 대비들이 있었다.

  추수 때에는, 곡식 낱알이 남겨져야 했으며, 나무의 올리브와 포도원의 포도들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과부들, 고아들, 이방인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취할 권리가 주어졌다. (19:9-10,23:22,24:19-21)

  매 삼년마다 모든 산물의 십분의 일을 지역 마을에 내게 되어 있었는데, 이는 아무 유업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레위인들과 더불어, 우리가 언급해온 이 세부류의 사람들이 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4: 28-29, 26:12-15).

   매 칠년마다 땅은 갈지 않고 내버려두어야만 했고, 포도나무들과 나무들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야 했는데, 그렇게 해서 땅 주인은 그 이전 해의 소산물중 남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했던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해에 그것으로부터 나는 것은 무엇인든지 수확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 (23:10-11 , 25:1-7)


  이러한 것들은 어떤 힘에 의하여 시행되도록하는 대안이 전혀 없는 필연적인 법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기는 하지만 이와같이 '자비' 가 제도화되었다. 특별한 인간의 필요들에 개인적인 반응은 욥기 3116-22, 31-32절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의로운 사람들로부터 또한 기대되어졌다.

 

  평등에 대한 관심은 구약의 저자들과 관련된 또다른 필요속에서 반영되고 있다.이스라엘의 독특한 위치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연례적으로 행하는 커다란 축제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은 단지 연례적으로 행하는 커다란 축제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은 단지 그가 요구된 제사에 드릴 물질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였다. 그래서 신명기는 "너희 가운데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 (16:9-15) 를 포함하기 위하여 칠절절과 초막절 때에 가족의 범위를 넓힐 것을 명하였다. 제사법에는, 이민자들을 이스라엘의 제의적 삶 속에 충분히 참여시키고자 하는 확대된 조항이 있는데, 이는 개종자가 되는 과정을 어느 한곳에서도 명백히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들을 개종자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 유교물 금지, 12:19.희생, 17:8,15:14, 26, 피 먹음 금지, 17:10,12).

   일반적으로 "본토인이나 이방인" 이나 하나의 율법이 적용된다. 단지 몇가지 조항만이 다르다. 이스라엘 우거하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노예를 살 수 있으며 (25:45), 우거하는 이방인들은 히브리 노예들을 살수 있다.(25:47) 레위기 25장에서 전통적인 노예법을 철저히 개혁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은 이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양보되어졌다. 신명기는 스스로 죽은 어떤 것을 먹지 말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금하고 있으나,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거나 외국인에게 파는 것은 허용한다. (14:21) 그러나 레위인들은 그러한 고기를 먹는 이방인들은 부정하다고 강조한다 (17:15)

   이러한 규정들이 가난한 자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만한 복지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가정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매우 진취적인 사람들이었으며, 어려운 상황들속에서도 그들의 최선을 다했고, 때때로 음식 형태의 자비를 필요로 했으나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그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자주 방해하는 무법자들로부터의 보호였다는 점이다. 다음의 말은 과부,고아,이방인들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된 관심이다.

  "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 22: 21-22) 이러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는 본문들을 다음과 같이 몇가지 인용해볼 수 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24: 17)

   (어떤 사람들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았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잡으므로 [24;9)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82:3)

....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17)

 

  이러한 명령들과 책망들이 때때로 부자들에게 명백하게 주어지기는 했지만 (, 5:26-29,왕에게 대한 명령, 22:3), 그것들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어떠한 "계급투쟁"을 위한 증거도 제공하지는 않았다. 적극적이기도 하고 소극적이기도 한 그 명령들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 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그것들은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들을 보호하기 위한 책임을 그 양심에 맡기고 있는, 필연적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를 고려해만 할 것이다.

 

   구약이 가난한 자들의 곤경에 대하여 가장 자주 언급한 것이 무엇이며, 과부들과 고아들, 그리고 이방인들의 곤경에 대하여 가장 빈번히 언급되어지고 있는 구약의 관심들이 무엇이었가를 생각해볼 때, 스가랴나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집단들 가운데서 자연스런 유사성을 보았던 이유가 자명해진다. 과부들이나 이방인들 모두가 가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것은 그들의 불확실한 사회적 지위였다.

   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약하였으며, 그러므로 구약이 가장 자주 언급하고 있는 곤경은 배고픔이나 집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지킬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압제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스가랴가 말하고 있는 진정한 공의는 그들이  그것을 주장할만한 충분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거절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아래와 같은 일들을 계속하는 이들을 책망한다.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귄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 (10:2 .5:28,31:5)

 

그리고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표준은: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재판하여, 간관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31:9)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82:3)

 

  우리의 표준들에 의하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최저 수준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정상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 자체의 표준에 비추어본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상당한 가난과, 최저 수준에 이하로 떨어질 긴박한 위험에 직면하거나 혹은 이미 상당 기간 그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산간지역의 땅의 척박함, 가뭄, 뚜기 재앙, 나무들과 동물들의 죽음, 그리고 사람의 차원에서는 사고들과 병, 책, 게으름, 그리고 부정한 거래들, 그러한 많은 요소들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의 사회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일반적인 지혜를 사람들에게 성공

하려면 근면하려고 충고하였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10:4)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느니라 (13:18)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자는 존영을 얻느니라 (13:18)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19:15)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관찰들은 다른 사람들이 도달하였던 결론, 다시 말하면 모든 가난이 당연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구약 저자들을 이끌지 못했다. 그 잠언들은 사람들이 왜 가난한가를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사람이 일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요구호 대상자임과 유랑은 죄악이며, 억제되어야 하고 처벌되어져야 한다"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었던 19세기 중반 미국의 자조적 도덕성은, 부자들은 그들의 의롭기 때문에 부자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가난하다고 하는 결론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데, 이는 단지 주조면밀하게 선택되고 그래서 아주 왜곡되어진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구약은 최대한 관심과 진짜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가난의 원인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10:2 , 12:5. 32:7)

 

  가난함과 헐벗음, 집없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들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불법에 의하여 훼방당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 점에 대하여 구약이 분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공의를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전체 공동체의 특별한 관심으로 등장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공의를 얻는 것이 왜 그리 힘이 들었을까? 우리가 들어볼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떤 중요한 사회 계층들도 없는 중서부의 작은 도시 (인구 240)인 나의 고향에서의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기억한다. 의심할 바 없이 학교 교장 선생님, 두명의 목사님, 그리고 아마도 두명의 은행원들은 어느 정도 존경을 받았다. 그들의 부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역할 때문에 그러나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위세를 얻었다고 말해질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곳은 매우 민주적인 곳이었지만 그 도시에는 가난한 가정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사람은 여하간에 집이 있었다. 절연을 위하여 샛기둥에 마분지가 박힌, 이전에 자동차 정비소였던 빌딩 뒤에 그들은 살았다.

  나는 그들이 학대받은 적이 있다고 생각치 않는다. 그 아이들은 거칠었고 돌볼 수 없을 정도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이 굶주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확실히 가난했기 때문에,리들 모두가 그들을 나머지 우리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보았다는 것을 확신한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14:20,. 19:4).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18:23)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품위를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들은 낮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위세 있는 사람들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도울만한 영향력이 있는 친구를 그들 스스로 찾는 것은 어렵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인 어떤 사람에 대하여 " 성문서에 공의" 를 구하는 경우에, 혹은 위세있는 사람에 의해 부채를 짊어지게 된 경우에, 공동체의 장로들은 어떻게 위세있는 그들의 이웃에 반대하여 다스릴 수 있었을까? 위세있는 그들의 이웃을 원수로 만들게 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매우 정직할 때만 그렇게 할 수 있었. (가난한 사람들은 많은 존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 그 공동체 내에서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변호자가 되고자 할 때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언약 법전과 같이 이른 시기(아마도 사사 시대)에도 그 문제가 인식되었고, 명백한 법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하여졌다."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23:6)

조금 앞서, 양심에 대한 호소가 빈번히 나타남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부와 고아, 그리고 이방인들을 위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취급되어진 "사악한 자들" 의 행위이기 때문에, "왜 내가 해야 하는가?"는 양심의 문제는 좀더 생각을 요한다. 우리는 또한 공평에 대한 관심의 증거를 보아왔지만 그것을 일으킬 만한 어떤 계획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부의 분배에 있어서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평등을 이상으로서 말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당연히 한다. 그것은 문제를 일으킬만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부는 하나님의 선하신 선물로 존중되기 때문이. 922:4) 많은 본문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문제는 남의 것을 빼앗는 데 대해 양심의 찔림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만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그들의 것이 되어야 할 것들을 빼앗길 때이다. 아마도 "중용" 에 대한 구약의 요구는 사회를 위한 계획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관점에서 가장 잘 표현된다고 하겠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도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30:8-10)

 

  이상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신명기 154-5절에도 나타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왜냐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이스라엘의 현실주의는 이것을 제한하여 덧붙이기를,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15:7-8)

   그 문단은 결론짓기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15:11)라고 말한다.

 

  이것은 있을 법한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154절은 종말(그날에는 배고픔이 없을 것이다. 36:29) 에 앞선, 이 세계에서 그의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의 의도로서 여러번 반복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의도로서 여러 번 반복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물질적인 소유를 지닌 사람들과 권세를 지닌 사람들에게 주는 것과 보호하는 것의 두가지 책임을 지우신다. (정의를 유지하는 책임).

 

  "왜 내가 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첫번째 답은 이와 같다.

   왜냐하면 고아와 과부, 이방인들의 운명은 우리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시는도다 (146:9,. 10:18).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특별한 필요들을 지닌 여러 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으로 말해지기보다는, 사람들이 이러한 책임들을 지녀야 한다는 그분의 주장을 강조하시는 분으로 말하여진다. 과부, 고아, 이방인들의 학대는 때로 심판에 대한 특별한 이유로 인용되기도 했지만, (. 1:23, 22:7, . 94:6) 징계에 대한 두려움이 이 사람들에 관련된 법들에 호소된 일반적인 동기는 아니다. (22:23-24와 레 18:28은 예외이다) 또한 축복의 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14: 29)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특별한 그것이 무엇과 같은 것인가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들을 발견한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었음이니라"

 (22:21, 23:9,19:34, 5:15,10:19,16:12,23:7,24:18,22) .


  비록 그것이 단지 신명기 515절과 2418절에서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감사의 동기가 아마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몇몇 다른 동기 조항들은 그 노력이 가난으로 인한 존엄성의 상실이 야기한 평등 개념의 파괴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의 위치에 너 자신이 서 보아라. 너는 그것이 무엇과 같은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들 모두가 이방인들이며, 그들은 너희와 똑같은 느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24:14-15).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굴욕스러운 일이기에, 어떤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할 수밖에 없고, 또한 갚기 위한 담보물을 세울 때에는,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자 말아라.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지니라" (24:10-11)

   만일 그 담보물이 그의 외투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만 한다.냐하면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 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22:27)

  과부의 품위는 어떠한 환경하에서도 그녀의 옷을 취함으로 인해서 떨어져서는 안된다(24:17)


 힘없는 사람들에 관련한 법들에 덧붙여진 대부분의 동기 구절들은 이러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힘있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며, 그들과 똑같이 가치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되새기게 하며 설득하는 것, 것을 위한 토대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같은 느낌들을 나누는 것과 같은 그들의 일반적인 인간애지 만, 근본적으로는 이 사람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존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10:18-19)

 

   구약에 의하여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 갖도록 명해진 태도의 본질은,로들 간의 차이를 없애는 방법으로 우리들의 풍부함을 덜 운이 좋은 자와 함께 나누는, "자애로운 일들"과는 이처럼 다르다. 구약은 한가지면에 있어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 땅은 내것이다.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23)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번영은 우월함을 표시하지 않으며, 가난도 열등함을 표시하지 않는다.

   ... 너희는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19:15)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22:2)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약의 접근에 있어서 약점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개인주의적 의로운 이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의로움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전혀 강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에의 관심은 여호와의 대표자로서 (72:2-4), 왕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그 법은 하나의 통치로부터 다음 통치로 이어질 수있는 계획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년의 이삭줍기와 삼년마다의 십일조, 안식년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도움이 가능하였겠는가를 말할 수 없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바쳐지는 십일조가 항상 충실하게 이행되지 않았다는 증거 (13: 10-12,3:8-10) 가 있다. 또 우리는 안식년이 얼마나 규례대로 잘지켜졌는가 하는 것 (지켜진 것 - 마카비 16:53,무시된 것 - 26:34-35) 이나, 혹은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많은 좋은 것들을 땅없는 이들에게 가져다 주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포로이전의 선지자들은 당시의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속한 땅을 전유하는 것(5:8)과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빚 대신에 종으로 파는 것92:6,8:6) , 법정에서 공정한 판결을 어그러뜨리는 것 (1:23, 5:27-28 )들을 책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제공하고자 하는 개혁의 계획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를 망케하려는 " (8:4) 였으며, 끝이 또한 임박했기 때문이다."(8:2,10, 5:31)

그렇다면, 구약이 부와 가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현대 사회를 위한 어떤 규범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예로서 과부와 고아, 이방인들에 대한 구약의 강조 바로 그것 때문에, 구약의 자료는 기술적인 목적을 위한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땅에 있어서 어떻게 적절히 부가 분배되어졌는가와 그들의 지위를 좀더 낫게 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가 주어졌는가를 결정하기 위한 구약의 궁긍적인 기준은 진단하는 데 쓸모가 있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쓰여질 수 있다. 경제적 체계가 어떻다 할지라도, 그 지역이 상대적으로 가난하든지 혹은 부유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체계가 얼마나 좋은가와 얼마나 그것이 잘 수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과부와 같이 갑작스럽고도 비참하게 예상치 않은 운명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고려해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고아와 같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들 자신을 돌볼 수가 없어서 모든 그들의 필요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지켜볼 수 있다. 그러한 사회에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나 많은 기회들이 거기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방인이 되는 것은 얼마나 불유쾌한 것일까를 연구할 수 있다.

   그리고 과부와 고아, 이방인들, 그리고 그와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에 대한 구약의 비전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고칠 제도적,비제도적 방법들을 찾는 것은 그 사회의 "의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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