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한국의 감리교 사람들(1) 조선의 가을보리를 시작하며

솔석자 2016. 5. 26. 23:46

한국의 감리교 사람들(1)

 

조선의 가을보리를 시작하며

 

  ‘한국의 감리교 사람들시리즈를 기도하며 계획한 것은 척박한 이 땅에서 어떻게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졌는가?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를 발견하고, 조선의 초기 감리교 사람들의 가을보리같이 끈질기고 순수하고 싱싱했던 신앙적인 삶과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민족을 사랑하며 그 속에서 지켜 온 올곧은 믿음들을 오늘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한 세기의 끝, 11시의 품꾼으로 이 땅을 찾아왔던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선택받은 조선과 조선 사람들의 모습의 일부를 먼저 소개하고서 우리 한국 감리교회의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 1843-1928)가 쓴 아펜젤러의 전기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Fleming H. Revell Co., 1912) 하나님의 조선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이 선택받은 땅 조선을 바라보며 상당히 진솔한 마음으로 기록한 이 글은 부분적으로 왜곡된 면도 없지는 않다. 그들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땅, 즉 신명기 87-10골짜기와 산에서는 지하수가 흐르고, 샘물이 나고, 시냇물이 흐르는 땅이며,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돌에서 쇠를 얻고,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이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에서, 너희는 배불리 먹고 주를 찬양할 것이다라는 말씀의 그 땅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인간의 조선이라는 글 속에서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당시 이 땅에 살고 있던, 아직 선택받지 못했던 조선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자.

 

 

   하나님의 조선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심을 받은 그대로의 조선, 그리고 자연이 가져다 준 그대로의 조선은 신명기 8장에 그려진 약속의 땅처럼 영광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다만 유교로 바보가 되어 버린 이 나라 사람들이 그 약속의 땅의 모습을 모르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토지의 비옥도는 평균치 이상이므로 이 나라 사람들이 다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이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등잔기름이나 비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한한 식량 창고이기도 하다. 육지의 바위에는 광맥이 많아 여러 풍부한 광물의 전시장과도 같다. 값지고 유용한 금속이 매우 풍부한 것이다. 목재의 보고인 북쪽의 삼림, 교통을 통한 연결의 가능성, 천연 자원과 그 잠재력의 다양성 등은 독실한 신자의 입장에서 보건, 과학인의 입장에서 보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도록 만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차지인(借地人)으로서,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커다란 힘을 부여받은 능력자로서 이 아름다운 땅 위에 놓여진 사람들이 땅으로 하여금 보다 풍요로운 소출을 내게 하고, 바다와 보물 창고인 산과 금빛 모래가 풍부한 강으로부터 그들의 생활을 평안하고 풍요롭게 하며, 보다 고양시킬 수 있는 물질을 얻어 내도록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인간의 조선

 

   그들은 산의 웅장함,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 등의 자연의 미에 매우 민감하였으며, 그의 조국과 조상들의 전통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숭상했다. 또한 그들은 품위가 있었으며, 예절바르고 위엄을 지켰다. 그들은 예의를 지키기 위하여 오랜 기간 동안 수련을 하였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물려받은 환경에 익숙해 왔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첫 눈에 불쾌하고 역겹게 여기며 경멸하는 것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냄새에 대한 감각만 하더라도, 민감함이나 무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역시 그것은 교육의 문제였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뿌리 깊은 관습에 따라 묵묵히 살아왔기 때문에, 관습을 철칙처럼 여겼으며, 그들에게는 환경이 부여하는 관례를 따르는 것도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한 마디로, 무덤과 무덤에서 울려오는 목소리가 그들을 지배했으며, 그들의 황금시대에 대한 이상은 과거 속에 존재하였다. 서울에 살고 있을 경우, 양반들은 음악 소리에 따라 아침에는 잠을 깨고, 밤에는 평화롭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마 그 음악은 성문이 열리고 닫힐 때 울려 퍼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촌락에 있을 경우에는, 높은 담과 성문 등 시골에는 없는 서울의 영광에 대한 환상을 지켜나가기 위해 비슷한 음악을 악기로 연주하였다. 아침 식사 때는 여인과 하인과 아이들이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낮 동안에 그들은 관리로서 직무를 수행하거나 남의 식객이 되거나, 담배, 오락, , 가무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서울의 중심에 있는 가장 큰 종(보신각 종)의 통금 종소리와 성문이 닫히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그들에게 하루가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그런 다음 남산 꼭대기에 봉화가 타오르는 것을 쳐다보곤 했다. 이 봉화는 마치 전보처럼 국경이나 해변에서 불을 통하여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산꼭대기에서 산꼭대기로 전달되어 나라 안에 모든 것이 평화롭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저녁 아홉시가 되면, 그들은 자기 혹은 이웃의 사랑방에서 가벼운 음식을 들거나 앉아서 오락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에 가정의 여인들은 자유롭게 문 밖으로 나가, 거리에서 신선한 바람을 쐬거나 이웃 나들이를 하였다. 이때가 바로 한국 여인들에게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서양인의 예법에 대한 관념과는 정반대로, 여인들이 나들이를 하고, 잡담을 나누며 서로 돕는 이 시간에 만일 남자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발견되면, 그들은 곤장으로 엄하게 처벌을 받았다. 많은 이방인들이 서울에 들어와 근대화시키기까지는, 이 시간에 남자와 소년들이 밖에 못 나온다는 것은 하나의 규칙이었다. 이 때 길거리에서 춤추는 듯한 수많은 등불은 여자의 특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밤에 돌아다니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음식과 옷이 마련된 풍족한 집안의 가장은 노년기까지 편안히 살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죽어서 조상들과 함께 언덕에 묻힌 후에도 효성스러운 아들들이 족볼간직하고 자신의 제사를 지내주며, 자신의 무덤이 침해받지 않고 단정하게 지켜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 가문의 존속에 대한 욕구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과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을 경배할 아들을 얻고자 하였다. 이렇게 한민족은 자신이 볼 수 있는 통찰력과 지식의 범위 내에서 정상적인 번영의 시절에는 자신의 몫에 만족하였다. 누추한 생활을 하고 힘든 세금을 바쳐야 하는 사람이든, 특권 계층에 있는 사람이든, 그들은 때로 불만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들이 운명(팔자소관)이나 관습 혹은 천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복종하였다. 때문에 보다 높은 수준의 생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생을 매우 낙관적으로 바라보며 남들에게 크게 친절을 베푸는 습관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여러 덕목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록 그것이 도가 지나칠 때는 오히려 악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 덕택에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살 만한 좋은 세상으로 여겼다. 질병과 재난과 궁핍 그리고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억압 등을 다 지나가면 괜찮아지겠지하며 잘 견디어 왔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이러한 고통이 외국인 때문에 생긴 것이라거나 정복자가 지워준 멍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만 생각하여 심리적 보상을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