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82년/ 마침내 빗장을 열고/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2)

솔석자 2016. 5. 27. 18:23

1882

마침내 빗장을 열고

 

마침내 빗장을 풀고 대문을 연다

 

우리의 이름처럼

밝고 빛나는 아침

 

아직도 바람은 차가운데

마당 가득한 손님들

 

그러나 누가 알까?

간밤의 슬픈 일들을...

 

 

                                                                                   

                                                     5월 조 미 수호조약

                                                     5월 인천항 개항

                                                     6월 조 영 수호조약

                                                     6월 조 독 수호조약

                                                     7월 임오군란

                                                     8월 대원군, 청군에 피랍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2)

 

   마침내 빗장을 열고

 

   1882, 조선은 마침내 미국, 영국, 독일 등 열강들과 수호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인천항을 개항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되는 일대 전환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토록 굳게 잠겨 있던 빗장, 그 빗장을 풀기를 끝내 거부하던 흥선 대원군, 그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였다. 그로 인하여 도저히 가망없는 역사가 이루어질 뻔하였다. 새남터와 절두산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처형함으로 하나님을 그토록 슬프게 했던 그는 8월 어느 날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로 청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한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제 19세가 된 청년 윤치호는 일본 동인사에서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일본에 체재중이던 조선의 개화사상의 주도 인물들인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교류를 가짐으로써 개화사상에 대한 인식전환의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이러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확실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는 훈련이었다. 이어서 1930111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던 윤치호의 김옥균에 대한 회상을 들어 보자.

 

  조선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나던 천팔백팔십이년에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로 있는 김옥균(金玉均)씨가 사신으로 일본에 와서 나를 보고 일본말만 배우지 말고 영어를 배워야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태서문명을 직수입할 수 있다고 권고함으로 일본어는 그만큼 하고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하였소. 그러나 선생이 없어 두루 구하던 차에 횡빈(橫濱:요코하마)에 있는 화란(和蘭) 영사관 서기관이 조선을 연구할 의향을 가지고 조선말을 배우고자 선생을 구하던 차라 피차간 알게 되어 일천팔백팔십삼년 일월부터 공부하기로 하였소.”

 

   이렇게 하여 18831월부터 5월까지 하루에 한 시간씩 영어를 공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윤치호가 급히 필요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급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급하셔야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