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83년 다가오는 손길/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3)

솔석자 2016. 5. 28. 17:35

1883

다가오는 손길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이 민족의 고난을

 

이토록 인민을 도탄에 빠뜨린

우리나라 조정 수백 년을 생각하면

그같이 더럽고 금수같은 정부

진작 망하는 것이 도리이며

백만 창생의 복이리라

•• 윤치호의 일기 중에서 ••

 

그래서 하나님은 이 민족을 사랑하셨다

불쌍한 민중을 향한 구원의 손길을 펴시며

고통 속에 함께 계셨다

 

 

                          5월            미국 공사 푸우트(Lucius H. Foote), 부임

                                        윤치호, 푸우트의 통역관으로 귀국

                          8월            전권대사 민영익, 파미

                          915일경  민영익과 가우처, 열차 회동

                                         남궁 억, 관립 영어학교 1기로 입학(3)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3)

 

   

  다가오는 손길

 

  일본 동인사에서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던 윤치호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기회가 왔다. 때마침 조선과 미국의 수호조약이 지난 해 5월에 체결되어 미국에서 초대 전권공사로 부임하는 푸우트를 일본에서 만나게 됨으로, 마침내 18835월 그의 통역관으로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들을 위해서 예비 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그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미국 공사의 통역관으로

 

   윤치호는 1930112일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다섯 달 영어공부가 무엇이 변변하얐겠소. 영어교제 푸레마’ 1권을 겨우 뗐을 때에 조선으로 나오는 미국 공사 푸우트씨가 영어 통역을 구하게 되었소. 아무리 구하나 영어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필경은 내가 후보자가 되었든지 일본정무 외무경 정상형(井上馨)씨와 복택유길(福澤諭吉)씨가 번갈아 가며 친히 나를 불러 승낙을 권고함으로 응낙을 아니할 수 없었소.

   이래서 미국 공사 통역이 되어 공사 내외와 일본인 제등수일랑(齊藤修一郞)이라는 사람과 넷이서 황빈에서 미국 군함을 타고 제물포에 하륙하여 서울에 들어왔지요. 이것이 일천팔백팔십삼년 오월인데 그 전년에 조미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공사는 아무 지장없이 서울에 들어오자 정동에 땅을 얻어 공사관을 개설하였소.

일본사람 제등이가 따라온 것은 내 통역이 도저히 완전하지 못하여 공사의 말을 제등씨가 받아서 내게 일본말로 전하면 내가 그것을 다시 번역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는 처음 계약대로 삼개월 후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 혼자 되나 안 되나 번역을 하기로 힘쓰니 그럭저럭 말은 통하였지요. 그때 통역을 어떻게 하였는가 지금도 생각하면 우습지마는 실상 그렇게 어려운 국서도 없었음으로 실패는 없었던 것 같소. 나는 미국 공사관 통역으로 오면서 즉시 나라에서 벼슬을 받았는데, 관직인즉 외무아문통상교섭주사(外務衙門通商交涉主事)이었소. 요컨대 두 나라의 벼슬을 사는 셈이지요. 그때 월급은 멕시코주 달러로 오십원을 받고, 나라에서는 썩은 쌀 한섬을 록(祿)으로 받았지요.

   상감께서는 미국 공사관의 소식을 들으시려고 때때로 나를 부르심으로 참내(參內)하면 몇 시간씩 기다려야 알현케 되었소. 그때로 말하면 상감께서 낮에는 주무시고 밤에 정사를 행하시던 때임으로 저녁 때 불리어 들어가면 밤이 깊은 뒤에야 어전 지척에 시립하게 됨으로 나는 사모관대한 채로 그때까지 잠을 잤지요. 아마 내가 잠을 잘 잔다는 것을 물어 보셨는지 하루는 너 들어왔느냐?’ 하시더니 붓으로 이런 글을 종이 조각에 쓰시어서 주십디다.”

   “今日 外衙門主事尹致昊 拜眠笑衙門總理大臣.

  편저자주 : 쉽게 풀이하면 오늘 외무 관아 주사 윤치호는 잠자는 관아 총리대신이라는 뜻이다.

 

   국문사용 주장을 진언함

 

   “나는 미국 공사관 통역으로 있었지마는 나이 어린 내가 무슨 정치야 알겠소마는 당시로 말하면 명성황후가 영매(英邁)하여 신하들 사이에 경쟁을 붙이시며 신하들은 수구파와 개혁파 두 파로 나뉘고 그 사이에 김홍집의 중간파가 있어 정계가 혼돈한 때라 더욱 나 같은 연소한 사람이 나설 곳이 못됨으로 공사관 일만 보고 있었지마는, 그때 나는 조선 국문 즉 언문을 보급시킬 생각만이 간절하여 나라의 형편을 공사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또한 언문을 보급하여야 조선 사람이 속이 깨이겠다는 뜻을 누차 진언하였소.”

 

   나라 일을 염려함

 

   이날 북청부(北靑府)의 책실(冊室. 비서사무를 맡아보는 사람) 유기환(兪箕煥)형 편에 평서(平書)를 올리다. 밤에 신장(申丈/申岐朝)이 찾아와 시사를 토론하다.

   근일에 외지에는 화적들이 들끓고 성내에는 불한당들이 설치고 있다. 벼슬아치는 탐욕만 내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전폐가 제대로 풀리지 못하여 물가가 뛰어오르고 있으나 정부는 안민하는 일은 하지 않고 뇌물만 탐낸다. 인민들은 먹을 양식이 없으되 부역에 시달리고 있다.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사욕만 생각하고 척신과 환관들이 권세를 부려 매관하는 길만 열려 있다. 상하가 이익만을 취하여 관민이 모두 피폐하게 되니 우리 인민들의 도탄이 지금처럼 심한 때가 없다.(윤치호의 일기. 1883122일 일요일)

 

 

  예비하신 만남과 하나님의 역사

 

   18835월에 미국의 주한 전권공사로 푸우트(L. H. Foote. 1826-1913)가 우리나라에 부임하게 되고, 답례로 방미사절단장 민영익(閔泳翊. 1860-1914), 부단장 홍영식(洪英植. 1855-1884) 등의 일행이 그 해 7월 조선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 워신턴으로 가던 중에 열차 안에서 감리교 목사인 가우처 박사(J. F. Goucher. 1845-1922. 볼티모어여자대학 총장)를 만나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선교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가우처는 해외선교와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진 분으로 열차 안에서 민영익 단장과 만나 대화하는 동안 조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조선의 선교개척을 시도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가우처 박사 한국선교 요청

 

   116, 가우처 박사가 미국 감리회 총회 해외선교위원회에 조선선교 개척을 위하여 5천 달러를 헌금하였다.(윤춘병, [맥클레이 박사의 생애와 사업], p.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