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11시에 선택된 일꾼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히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 아펜젤러 일기 중에서 -
1월 12일 윤치호의 외유에 대하여 고종,윤허
1월 14일 뜨루신학교에서 아펜젤러의 한국 파송을 위한
특별예배를 드림
1월 26일 윤치호, 중국 상해로 망명
1월 27일 윤치호, 중서서원에 입학
2월 3일 미감리회 한국선교단 출발
3월 3일 일본에서 언더우드와 만남
3월 31일 조선선교회 조직 임명
4월 5일 아펜젤러 내외, 인천 도착
(4월 13일에 다시 일본으로 감)
4월 18일 천진조약(청일간)으로 서울 시내 질서회복
5월 3일 스크랜튼 의사, 단신 내한
6월 20일 스크랜튼 모친과 아펜젤러 일행, 내한
8월 1일 조선선교회(제1회) 개최
8월 3일 배재학당 개교
9월 10일 감리회 정동병원 진료 시작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5)
망명
1885년 1월 11일 일요일
예궐하여 외유할 것을 주청하다. 공사관에서 자다.
1월 12일 월요일
아침에 미국 공사와 함장이 인천 제물포로 떠나다.
밤에 예궐하여 외유 자원하는 종이 위에 ‘지도(知道:알았다 혹은 승난한다는 뜻)’ 두 자의 어필을 받다. 삼전(三殿:왕, 왕비, 왕세자) 앞에 엎드려 절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다.
1월 19일 월요일
아침 8시에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다.
1월 22일 목요일
점심 때 나가사끼에 도착, 상륙하다.
1월 23일
아침에 머리를 자르다
(중략)
이날 미국 공사 내외와 손을 잡고 작별하다. 몇 년을 같이 사는 동안에 성실하게 서로 믿어 정이 한 집안 부모와 같았는데 이제 작별하게 되고 또 서로 만날 기약이 없으니 어느 틈에 눈물이 나와 수건을 적신다.
밤에 사서기(司書記)와 작별하다. 10시경에 소림여점(小林旅店)에 가 행장을 챙겨 가지고 작은 배를 타고 오다. 바야흐로 배 떠날 때에 하늘에 가득한 새벽달이 물에 비치어 바닷물을 더욱 밝히고 있어 멀리 떠나는 나그네의 회포를 다른 날보다 갑절이나 더하게 한다.
11시경에 배에 올라가서 자다.
새벽 4시경 배가 출발하다.
1월 26일 월요일
아침 8시에 배가 상해에 다다르다.
(중략)
미국 영사관 서기와 내일 아침에 중서학교에 가보기로 약속하다.
상해 감리교 중서서원 입학
1월 27일 화요일
아침이 차다. 9시에 미국 영사관 서기와 같이 중서학당을 가 보고 돌아오다. 저녁 때 혼자 학교 교사를 찾아가 내일 아침부터 공부 시작할 것을 약속하다.
아침에 알렌을 만났는데 푸른 눈, 아름다운 구렛나루, 풍채가 헌앙(軒昻)하다.
1월 28일 수요일
아침에 학교에 가 공부하고 12시에 돌아오다. 지리와 문법에 관한 것이다.
구원의 역사
2월 15일 일요일(성상 즉위 22년, 개국 기원 494년 1월 1일)
아침에 일어나 부모, 친족, 군부, 군모, 동궁, 왕실 여러분과 조선 인민이 새해부터 만복 대길하고 청평 안락하기를 가만히 빌다.
아침 11시에 미국 선생과 같이 예배당으로 갔다가 선생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들고 숙소로 돌아오다.
이때부터 주일예배는 학교 예배당과 불란서인 예배당과 마국인 예배당에서 함께 드리고 삼일 기도회는 알렌의 집에서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마다 성경공부를 하였다.
7월 1일 수요일
수업 여전하다. 아침에 비오더니 저녁 때 개어 태양이 찬란하다.
이 날 청국인을 평한 원고를 본넬 선생에게 보이다. 본넬 선생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선비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흑백을 논평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외국인이나 청인을 평하는 것은 君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좋다. 그러나 귀국의 일을 평하는 데 있어서는 결코 방심하여서 안 된다. 대저 압제적 정치에 대한 정언 직론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니 君은 삼가야 할 것이다. 붕우에 대한 서찰은 더욱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 눈에 거리끼는 말이나 입에 익숙하지 않은 평이 있으면, 바라건대 소홀하게 글로 써서 남에게 주어 수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시태(時態)와 인정에 통달하고 진퇴와 억양을 알아서 제자를 가르치고 경계하는 것이 참으로 남의 스승으로 부끄러움이 없다. 고마웁다.
밤에 알렌 선생 댁에 가 설교를 듣고 오다. 시간이 9시 반이다.
(윤치호의 일기)
조선의 첫 번째 복음사역자 아펜젤러의 보고
1885년 2월 3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미 감리회 선교사단 일행 5명은 태평양을 건너 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맥클레이 박사의 환영을 받고 잠시 머문 뒤에 3월 23일 아펜젤러 내외는 북장로회 언더우드와 함께 선편으로 일본 나가사끼를 떠나 4월 2일 부산항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다시 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인천항(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아펜젤러의 보고(1885년 연례보고서 중 일부)를 보면 당시 상황을 눈에 보는 듯하다.
“오전 8시 15분, 나는 갑판 위에 앉아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앞쪽으로 남쪽에는 작은 조선의 마을이 있다. 집의 벽돌은 진흙으로 높이가 8자 정도이고, 지붕은 이엉으로 엮어져 있다. 집집마다 모두 지붕과 똑같이 짚으로 덮여 있는 담이 둘러싸여 있는데 집 모양이나 색깔이 땅과 흡사해서 처음에는 마을을 알아볼 수 없었고, 마을이 얼마나 큰지도 헤아릴 수 없었다.
조금 뒤 오른쪽에 다른 마을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헐벗은 산의 경사를 따라 붙어 있는 것이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큰 벌집처럼 보였다. 마을을 발견한 데 힘입어서 계속 살펴보니 북쪽 해안을 따라 두 개의 마을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9시에 상륙해서 세관장인 로베트(W. N. Lovatt)씨를 방문하고, 곧바로 한국의 오랜 마을인 부산으로 3마일 정도 걸어 들어갔다. 길은 겨우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두 개의 가파르고 험한 언덕을 올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논밭을 보다가 밭을 가는 농부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것은 언젠가 보았던 “거룩한 땅”에서 쟁기질하는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나들이 옷을 입고 있는 건장하고 혈색이 좋은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돌 위에다 빨랫감을 놓고 방망이질하는 여인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얼굴을 돌렸다. 이것은 그들의 은거정신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남편을 제외한 외간 남자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땅은 마치 경작된 것처럼 매우 비옥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관심과 절대 나태가 이 나라의 빈곤과 불행의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기근 때에는 도와줄 아내가 없는 홀아비들이 많이 죽는다고 한다.’
다음날 우리는 부산을 출발, 제물포로 향했다. 춥고 비가 내리는 좋지 않은 날씨였다. 이런 날씨가 여행 기간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배는 느릿느릿 나아갔고, 심한 배멀미를 오랫동안 겪어야만 했다. 우리는 반도의 남단을 돌아 서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서, 이달 5일, 일요일 정오에 한강 입구로 들어왔고, 오후 3시에 이곳 제물포항에 닻을 내렸다. 이곳의 강은 넓고 얕아서 상륙하기 위해서는 거룻배를 타고 3마일 쯤 나와야 했다. 비록 사람의 손은 잡아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육지’에 올랐다. 백 명이나 되는, 더럽고 누더기를 걸치고 모자도 안 쓴 인부들이 배에 있는 화물을 향해 덤벼들었고 계속 야단법석이었다. 비록 여기 있은 지 며칠 안 되지만 사람들의 끊임없는 고함소리는 시편 기자의 질문을 상기시킨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는가?’
아내(Mrs. Appenzeller)가 먼저 바위 위로 뛰어내렸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이런 것들이 곧바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물포에는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경영하는 호텔이 없다. 일본 호텔이 하나 있다고 들었기에 인부 한 사람을 불러서 몸짓으로 짐을 옮겨 달라고 해 놓고는 곧바로 출발했다. 호텔 방은 편안하고 넓었으나 약간 싸늘했다. 식탁에 앉았을 때는 잘 요리되어 입에 맞는 외국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조선은 여전히 불안하다. 서울에는 불온한 요소들이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그것들이 완전히 뿌리 뽑힐 때까지는, 그리고 허약하고 무질서한 정부가 강력해질 때까지는 ‘밝은 아침의 나라(조선)’의 진보는 기대되기 힘들며 대신 많은 불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이만열, [아펜젤러], P.268~270)
배재학당의 시작
고영필, 이겸라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7월에 다시 돌아온 아펜젤러는 스크랜튼 대부인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광혜원에서 일하고 있는 스크랜튼으로부터 의술을 배우겠다고 자원한 두 청년에게 영어를 지도해 줄 것을 요청받고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 날의 상황은 그의 일기를 살펴보면 좀 더 상세히 나타나 있다.
“나는 지난 8월 3일(월), ‘고영필’과 ‘이겸라’ 두 조선학생을 데리고 나의 학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의 교육선교의 시작이었으며, 배재학당의 시작이었다.
(아펜젤러의 일기, 1885. 8. )
스크랜튼의 의료선교 시작
1885년 5월 3일 단신으로 먼저 서울에 들어온 의료선교사 스크랜튼(W. B. Scranton, 29세)은 처음에 광혜원을 맡고 있던 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과 함께 사역하다가 9월 10일부터 정동주택에서 환자를 치료하였다.
그후 10월 10일부터는 공식적으로 의료사업을 전개함으로 감리교 의료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스크랜튼의 1885년 연례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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