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87년 벧엘에 제단을 쌓고 복음의 등불을 켜다

솔석자 2016. 5. 31. 17:27

(이만열, [아펜젤러], p.

1887

벧엘에 제단을 쌓고

복음의 등불을 켜다

 

 

 

 

학생 중에 한 명이 진리를 찾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한용경이다. 그는 작년 가을에 중국어 성경을 본 이

후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지난 주와 지지난

주일 저녁에 어둠이 깃든 후 빛을 찾아서내게로 왔

. 나는 그와 다름 사람들에게 하루 속히 빛이 오기를

                                       기도했다.

- 아펜젤러의 일기 중에서 -

 

 

 

 

 

221일 고종황제, 배재학당 이름 하사

43일 윤치호, 중국에서 세례 받음

724일 한국 감리교의 첫 세례자 박중상, 한국 감리교

회에서 첫 세례 받음

109일 정동교회에서 첫 예배, 신약성경 완역

1030일 신실한 사역자 여의사 닥터 하워드(Miss

Meta Howard), 신실한 교사 로드웨일러

(Miss Louisa Rothweiler) 입국, 여성병

원 보구여관(保救女館,민비가 이름 하사) 개설

12월 신실한 복음 사역자 올링거(F. Ohlinger)

사 가족, 입국, 남궁 억, 전권대신 조민희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다녀옴.

 

 

 

배재학당 이름 하사와 신앙의 새싹, 한용경

 

  오늘 우리 선교부의 학교 이름을 국왕(고종황제)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외무대신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배재학당(培材學堂) 혹은 “The Hall for the Training to Useful Men”이다. 이 문제는 얼마 동안 논의되어 왔던 것이다. 얼마 전에 대신은 언더우드의 학교에 대해 묻더니 그 학교도 이름을 가져야 하겠다고 했다. 이런 관심에 힘입어서 개인교사와 학생 한 명을 보내어 언더우드더러 이리로 오라고 했다. 이것이 한 달 전의 일이다.

   그후 나는 스크랜튼 부인의 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녀가 자기 집과 환등기를 보여주려고 그를 불렀을 때였다. 그는 그때 다시 며칠 내로 가겠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여기에 오지 않았고, 오늘 외무부의 서기요 통역관인 김씨가 커다란 한자로 새겨진 학교 이름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정부의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은 것이 된다. 이제 비록 국립학교는 아니지만,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가 되는 것이다.

   학생 중에 한 명이 진리를 찾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한용경이다. 그는 작년 가을에 중국어 성경을 본 이후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지난 주와 지지난 주일 저녁에 어둠이 깃든 후 빛을 찾아서 내게로 왔다. 나는 그와 다른 사람들에게 속히 빛이 오기를 기도하였다.

(아펜젤러의 일기, 1887221. 월요일)

 


  *편저자주: 고종황제는 교명을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고 친히 지어 주시고 당시 명필가인 정학교(鄭學敎)의 글씨로 현판을 쓰게 한 후 외무대신 김윤식이 직접 아펜젤러에게 전달했다(김세환, [배재 80년사]).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7)

 

조선 사람으로서 첫 감리교 수세자가 됨

 

   1887년 그의 신앙 지도교사였던 본넬(W. B. Bonnel) 선교사가 그에게 세례받기를 권유함으로, 드디어 결심한 그는 24세의 나이로 원봉진교서’(願奉眞敎書)라는 신앙고백서를 제출하고 본넬 교수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최초의 감리교 수세자가 되었다.

 

   상오 10시에 삼가 세례를 받다.

   이날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한데 바람도 잔잔하고 구름도 걷히어 근일에 제일 좋은 날씨이다. 이날부터 나는 삼가 교를 받들고 주를 믿을 것을 맹세하였으니 가히 일생에 있어 제일 큰 날이라 하겠다. 감독회(감리교)에 들어간 것이다.

   오후 1시 경에 본넬 선생 댁에 가 점심 들고 3시에 충일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다. 6시에 친구(凌蔭光)와 같이 충일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오다.

 

 

   윤치호의 신앙고백서 원봉진교서(願奉眞敎書)

 

   나의 과거와 현재,

   저는 상해에 오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교도의 나라에서 태어난 때문이며, 이교도 사회에서 성장한 때문이며, 이교도 글을 읽으며 배운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를 알게 된 후에도 계속 죄를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결하고 고결한 생활 보다는 감각적인 만족을 좋아했기 때문이며, 인생은 짧은 것이므로 가능한 한 많이 즐겨야 할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며, 완전한 사람에겐 의사가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내 속에 죄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제 품위는 더욱 떨어졌습니다. 1886년 초부터 그해 말에 이르러 저는 지금껏 제가 추구하던 것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연유는, 저의 악함을 깨닫게 되었고 장차 올 세상을 위해 순결한 영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으로 전에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움으로 진정 죄 없이 산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최근까지 유교의 사서(四書)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적잖은 교훈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교훈에 매인 바 없었고 또 그 가르침들이 영혼의 문제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였으므로 제가 구하는 바를 그것에서 찾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악한 행실들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고 꿀처럼 좋아했던 몇 가지 대표적 죄를 없애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습니다. 이런 결과는 성경과 다른 신앙서적 및 신앙강연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개종하는 데 방해되었던 것들은 박해와 조롱에 대한 공포, 옛 친구들을 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 수시로 생겨나는 의심과 다른 유혹들로부터의 공격들이었습니다.

   저는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그 소원하는 바는, 제가 가진 시간과 달란트를 그것이 한 달란트든 다섯 달란트든 그것을 기독교 신앙과 지식 증진에 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 자신과 제 형제들을 위해 유익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밤(죽음)이 닥쳤을 때 구원을 찾을 필요가 없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고 또 갈래 길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이 사랑이심과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이 육적인 세계에 대한 예언이 말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장래에 대한 것도 그대로일 것입니다.

(이덕주,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 P.124~125)

 

 

 

왕비께서 학교 이름(이화학당)을 지어주심

 

 


   왕비(왕후 민비)께서는 이 학교를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고 이름을 지어 보내주셨다. 조선에서의 배꽃은 불란서의 백합화나 영국 랭카스터가의 붉은 장미꽃에 해당하는 꽃이다.

(ARMEC, p.313, 1887)

 

 

  한국 감리교의 첫 세례자 박중상

 

  오늘 나는 우리 집에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이름은 박중상인데 우리 학교 학생으로 진지하고 총명한 젊은이다. 그는 일본에 갔다 왔으며 그곳에서 기독교에 대해 처음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하야가와 형제와 교제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세례 권고를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 이곳에서의 우리 일의 시작이다. 나는 그를 온전히 여호와의 손에 맡겼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오직 그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불어나게 하옵소서.”

 

   그는 약속의 사람이다.

(이만열, [아펜젤러], p.307, 1887. 7. 24)

 

 

   두 번째 세례자 한용경

 

   102일 일요일 저녁에 교회 내 자리에서 두 번째 세례를 주었다. 그는 우리학교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인 한용경이다. 나는 언문으로 번역된 세례의식서를 가지고 조선말로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09일 일요일에는 벧엘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그곳은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매입한 집이다. 지난 주에는 만주 우장에 있는 존 로스(John Ross, 한국명 羅約翰) 목사가 이곳을 방문했는데 두 사람의 조선인 신자를 데리고 왔다. 그 중의 한 명은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로스 목사가 그가 만난 조선사람 중에서 제일 우수한 사람이라고 추천을 해서 나는 그를 두 번째 권서인으로 채용했다.

   현재 4명의 조선사람 신자가 있는데, 2명의 권서인과 강씨, 그리고 구도자요 진리를 믿고 있는 최씨의 아내 등이다.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서 조선식으로 앉았다. 내가 기도(영어로)함으로써 시작하여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 그런 다음 장 형제가 마치는 기도를 인도했다. 모임은 우리에게 깊은 관심으로 가득찬 것이었으며, 나는 하나님께 이 모임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심지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현재 서울에는 교인수가 준교인을 포함해서 7명이다. 여기에는 2명의 일본인 형제가 들어 있다. 구도 중인 여러 사람들이 있다. 나는 지금 학교의 새로운 학급문제로 걱정 중이다.

(이만열, [아펜젤러], p.308~309, 1887. 10. 11. .)

 

 



조선의 첫 성찬예배와 최초의 여성 세례자 최씨부인

 

  

  1026, 지난 수요일 아침에 나는 두 사람의 권서인 최씨와 장씨를 시골로 보냈다. 최씨는 황해도와 평양을 방문할 것이고, 장씨는 곧바로 평양으로 가서 의주로 가는 대로를 따라 3개월 동안 돌아다닐 것이다. 여행 비용으로 그들은 22달러를 가지고 갔다. 이 사람들을 이렇게 내보내는 것은 내게 있어서 넘치는 특별한 은혜였다. 그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후 나는 그들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찾고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떠나는 저들의 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어제는 언더우드 형제를 대신해서 외국인들 앞에서 요셉의 일생에 대해 설교를 했으며, 그런 후에 안식했다. 회중 가운데 몇 명은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

   1030일 토요일 오후 4시경 의학박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양과 부인 외국선교회의 선교사인 루이자 로드웨일러(Miss Louisa C. Rothweiler)양이 도착해서 우리 모두로부터 아름다움 환영을 받았다. 우리 선교부가 받은 최초의 증원군인 이들은 자신들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었던 업무를 기쁘게 맡았다.

   1016일 주일 날에 나는 29세의 젊은 부인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녀는 질문에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거의 틀림없이 이 나라에서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세례받은 최초의 여성일 것이다. 나는 우리 감리교가 안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매우 기쁘다. 말씀을 받은 다른 여성들도 있다. 이 첫 열매들로 인하여 여호와께 찬양을 드린다.

   일주일 후 1023, 우리는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 예식을 가졌다. 이것은 감리교의 요람인 벧엘의 같은 방에서 있었다. 참석자는 형제들로는 최, , 강씨와 한용경씨 등이었고 자매는 최씨의 아내였는데, 박중상 형제는 불참했다. 스크랜튼 의사도 동참했다. 우리의 기도문을 사용했고 모두 경건하고 진지했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주다니 그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펜젤러의 일기, 18871031.)

 

 



벧엘의 산 제물 유치겸, 윤돈규

 


   지난 주일날(124) 벧엘에서 두 사람의 배재학당 학생, ‘유치겸윤돈규에게 세례를 주었다. 세례식은 새 집에서 거행되었는데, 새로 구입한 것으로 그곳은 이제 진정한 벧엘이다.

   세례식은 8x16피트의 방 안에서 거행되었고 인상적이었다. 보스틴(브룸필드 38)의 감리교회 목사인 브린(S.E. Breen)씨가 세계 일주를 하던 중에 이곳에 들러 마치는 기도를 했다.

   지난 수요일 저녁, 이달 7, 우리는 한씨 집에서 최초의 학생기도 모임을 가졌는데, 그곳에 학생들, 즉 세례받은 학생들이 함께 모였다. 그들은 진지했으며, 나는 한국말을 보다 유창하게 사용해서 그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만열, [아펜젤러], p.314, 1887. 12. 11.)

 

 




 1887년의 성탄절 예배

 

   

  성탄절! 4개의 양말이 달려 있다가 오늘 아침 비워졌다. 즉 앨리스, 쿠퍼(Peter Cooper), 이서식, 최갑길(이 두 소년은 학생인데,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다.), 네 명에게 준 것이다, 토요일 저녁에 예수의 이야기를 이들 두 명에게 해주었는데, 이전에는 들은 적이 없었기에 매우 흥미로워했고, 선물을 받고는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산타 클로스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엘라는 내게 금시계줄과 손수 뜨개질해서 만든 한 벌의 벙어리 장갑을 선물했다. 나는 아내에게 은찻잔 한 세트(6개 들이)를 미리 주었던 셈인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교회는 붐볐고, 성찬식, 길모어(Gilmore)씨가 사회를 보았다. 설교는 짧았으나 적절했다.

   오후 2시에 나는 한국어로 최초의 설교를 했다. 이것은 말로 해야 되고 설명도 해주어야만 한다. 나는 설교문을 쓸 수가 없지만, 내 생각을 구너서인 최씨에게 말해 주면, 그는 그것을 적당한 조선말로 표현해 주었다. 쓰는 데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설교 일을 시작하게 되어 기뻤다. 본문은 마태복음 121, ‘이름을 예수라 하라등이었다. 물론 나는 설교를 읽고, 오로지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설교의 정신을 전할 수 있었다.

 

  전체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김명옥의 세례

2. 찬송

3. 스크랜튼 의사의 기도

4. 말씀봉독 마태복음 2

5. 말씀봉독 누가복음 2(스크랜튼 의사)

6. 설교

7. 주기도문

8. 친송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9. 축도

 

   나는 이것이 조선에서 행한 감리교 최초의 설교라 확신하며, 아마 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최초의 공식 설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후자에 관해서는 단정할 수 없는데, 나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언더우드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읽지 않고 말로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한국에서 2년 반이나 넘게 살면서, 한국말로 모임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로 설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는 거의 깨달을 수 없다. 그 설교는 형편 없었지만,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기에 주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한 그 노력을 축복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나와 듣는 이들이 어느 정도 편안하게 듣고 설교할 수 있을 때, 그날은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이만열, [아펜젤러], p.3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