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88년 서리 속에서도 싹트는 보리/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8)

솔석자 2016. 6. 2. 17:24

1888

서리 속에서도 싹트는 보리

 

 

기독교사업을 중지하라는 칙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성령께서 우리

학교에서 제일 우수한 학생들 가운데 4명을 방학 중에

내보내사 친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오도록 하셨

. 한 학생은 4명을 인도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들의 심령을 감동해 놓으셨다.

 

                                                      - 아펜젤러의 연례보고서 중에서 -

 

 

 

1월 여성 주일학교 시작

417~ 54일 아펜젤러, 언더우드, 북부지망 전

도 사업 시찰여행

59일 금교령으로 종교활동 전폐

5월 신실한 사역자 존스(G. H. Jones)목사, 입국

1016~ 1115일 아펜젤러, 의주와 평양 지경 전

도 여행

10월 윤치호, 상해 중서서원 졸업

11월 윤치호, 미국 밴더빌트 대학 신학부 입학

1125일 권사임명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8)

 

  아펜젤러와 신학적 교류

 

  1887124일 일요일 맑음

  오전에 성경공부하다.

  오후에 본넬 선생 댁에 가 점심 들고 우리나라에 있는 선교사와 편지 왕래할 일을 논하다. 밤에 해인복음회(海人福音會)에서 설교 듣고 오다.

 

  1217일 맑음

  오전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일본 우편으로 부치다.

 

  1888211일 토요일(음력 섣달그믐)

  간밤에 바람 불다. 오늘은 정해년(丁亥年) 말일이다. 금년 내 일신 사정을 돌아보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일이 여러 가지이다.

  제1, 금년에 내 행실이 전년에 비하면 매우 정결하니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도와주심 덕택이다. 2, 신상 무병하였으며, 3, 의식에 걱정 없었고, 4, 공부에 거침없어 1년 중 비록 내가 신약하고 게을러 하늘이 주신 때와 돈을 다 잘 쓰지 못하였으나 어찌 하늘이 나에게 박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집안 소식을 자주 듣지 못하여 답답하다. 밤새도록 눈 오다. 밤에 알렌 선생 댁에 가 기도회에 참례하다.

 

  44일 수요일 맑음

  청명하다. 중국 명절인고로 방학하다. 오후에 아펜젤러의 답장 받다.

 

  45일 목요일 흐림

  오후에 가랑비 오다. 밤에도 그치지 않는다. 아펜젤러에게 답장을 부치다. 오늘부터 성경번역을 조금씩 해보다.

 

  미국 밴더빌트대학으로

 

  912일 수요일 맑음

  오후에 본넬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그대를 미국에 보내어 밴더빌트 대학교에 들여보내고자 하는데 그대는 어떠한가?”라고 하기에 생각하여 대답하겠다고 하였다. 8시에 기도회 시작하다. 기도회를 마치니 알렌 선생이 나를 청하여 그의 집으로 가니, 밴더빌트 대학에 가기를 권하고 자기가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마 하니 고맙다.

 

  913일 목요일 맑음

  오후에 미국에 가기로 작정한 편지를 본넬 선생에게 주다.

 

  928일 금요일 맑음

  오후 3시에 본넬 선생과 알렌 선생부인에게 작별하고 배에 오르다(상해 출발)

 

  1026일 금요일

  오후 3시에 샌프란시스코 도착, 5시에 상륙하여 코스모폴리탄 호텔로 가다. 도로와 가옥의 굉장함과 시가와 물자의 화려함은 전날 꿈에도 못 본 것이다.

 

  114일 일요일

  밤 8시 반에 내쉬빌에 도착하여 얼윈하우스(Erwin House)에 와 자다.

 

  116일 화요일

  오전 8시에 루이스(Rev, Louis) 선생에게 가 함께 밴더빌트에 들어가서 신학박사 호스(Hoss)와 상면하다. 상해에서 무엇을 공부했는가와 또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가를 대강 써서 호스씨에게 주다.

  루이스 선생 집에 가서 점심 들다. 오후 3시 반에 호스 선생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오늘 오후에 이 대학교 교수회의가 있으므로 그대의 편지를 보고 아무쪼록 그대가 이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도록 주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당장 행장을 옮기어 이 학교에 들어와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고맙다. 밤에 얼윈하우스에 가 밥값을 치르고 밴더빌트에 와서 잠을 자다.

 

  1110일 토요일

  오전 9시 알렉산더 선생 방에 가 부르더스의 설교법(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 가르치는 데 참여하다.

 

  1121일 수요일

  오후에 틸레트(W.F. Tillet) 선생을 만나 보니, 내 학비를 담당하여 주마고 하였다. 언제 이 빚을 갚을는지.

(윤치호의 일기)

 

  *편저자주: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또 사용하시는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은 조선을 사랑하시고 또 이 민족을 사랑하셔서 여기 저기에서 일꾼을 뽑아 가꾸고 계셨다.




 

 

왕성해지는 역사, 1888년의 첫 세례, 박승면, 문세익

 

  어제(114) 나는 벧엘에서 두 번째 설교를 읽었다.” 두 사람에게 또한 세례를 주었는데, 스크랜튼 의사의 개인교사인 박승면과 우리 학교 학생인 문세익이다. 10명이 예배에 참석했고, 예배 시간은 좋았다. 아직 내 설교는 자유롭지 못하다.

토요일에는 다섯 명의 부인들이 세례 신청을 했다. 주께서 한국인들 가운데서 역사하시고 계신다.

(이만열, [아펜젤러], p. 317)

 

 

조선에서의 첫 결혼식, 한용경과 부인 박씨

 

   어제 저역 우리 선교부 전원과 장로교 선교부에서 온 한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이 있었는데, 나는 한용경과 과부 박씨를 부부로 맺어 주었다. 이것은 내가 주례한 최초의 결혼식이요, 한국 개신교 최초의 결혼식이었다.

  한씨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나의 두 번째 개종자였다. 그의 아내는 4개월 전에 죽었는데 그의 친구들이 이 과부와 혼인을 종용한 것이다. 그는 마가복음과 십계명을 그녀에게 보내면서 이것이 그가 믿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녀는 그것을 좋게 생각했다. 그 후 그는 결혼 식순을 번역하고 그 사본 하나를 그녀에게 보냈다.

  모든 것이 스크랜튼 의사와 내가 제안한 대로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이들이 제단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과 기독교식으로 부부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놀랍고 감동적인 일은 없었다. 신부는 25세로 침착했다.

  그 후 우리는 케익과 아이스크림, 그리고 차를 들었는데 이것 또한 감사의 제목이었다.

  오늘 크란스(Fr. Krans)씨가 1센트짜리 조선 동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산뜻했는데, 일본 동전 1센트를 본떠서 만든 것이었다. 그와 정부는 일이 이만큼 진척된 것을 축하하고 있다.

(이만열, [아펜젤러], p.318~319, 1888. 3. 15.)

 

 

 

서리 속에서도 싹트는 보리

 

  올봄에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 목사와 나는 한국 북부지방의 전도사업을 시찰하기 위해 출발했다. 의약품, 성경 쪽복음 그리고 소책자들이 팔렸다. 사람들은 서로 의약품을 사려고 안달이었고 후자들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여러 곳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2주일가량 여행을 했을 때 서울 주재 미국공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우리가 서울을 떠난 후에 대군주전하의 명령이라 하여 조선 외부로부터 공한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 중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전파하고 있음을 조선 정부에서 알고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조정에서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 조약상 공인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한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 대해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므로 마국공사로서 나는 당신들이 조선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종교의식과 규례를 집행하는 것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완전히 예상지 못했던 방해는 아니었다. 미국과 조선간의 조약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 조정의 반대에 직면해서 전도사업을 계속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의 즉각적인 순종이 조정에 매우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한 고관으로부터 들었다.

  기독교사업을 중지하라는 칙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도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성령께서 우리 학교에서 제일 우수한 학생들 가운데 4명을 방학 중에 내보내사 친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오도록 하셨다. 한 학생은 4명을 인도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들의 심령을 감동해 놓으셨다. 다른 한 명은 유숙하기로 한 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논쟁을 하게 됐는데, 관점의 차이로 인해 서로 낫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해결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었고 논쟁은 즉시 중단되었는데, 그는 얼른 짐을 챙겨들고 빨리 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상처 없이 도망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야밤에 4마일(6.4Km)을 걸어서 어느 농가에 도달했는데, 가는 길에 산에서 호랑이들이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며칠을 머문 뒤 떠나기 전에 집주인에게 12권의 책을 팔고 다른 곳으로 갔다. 집주인은 책을 사면서 이 교리들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더욱 좋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명은 지방의 수도(감영이 있는 도시)에 가서 여관에 들었는데, 친구들을 찾으려고 밖으로 나와 있을 때 수령이 그를 부르러 보냈다. 틀림없이 그가 기독교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권서인이 부재중이었으므로, 병사들은 여관집 주인을 붙잡아 때리기 시작했다. 그 여관 주인은 나라의 위신을 애써 지키려는 이 사람들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돈을 건네어 주었다. 이것이 효과를 나타내어 여관 주인은 풀려나고, 병사들은 돌아가서 나쁜 놈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권서인 학생이 돌아와서 여관집 주인으로부터 그가 어떻게 잡혀서 대신 맞았는지 듣고는 돈을 지불하고는 그들에 대한 증거로서 그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떠났다고 한다. 자발적인 봉사로 이루어진 이 학생들의 사업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아펜젤러의 1888년 연례보고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