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90년 복음과 치료의 역사

솔석자 2016. 6. 4. 23:49

1890

복음과 치료의 역사

 

 

귀수와 봉선 오마니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정직하게 일

하는 기독교인들이다. 봉선 오마니는 환자들에게 한글

성경을 읽어 주며 함께 기도한다. 최근에 조직한 여성

교회의 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며 기동할 수 있는

                                        있는 환자들은 부축해서 나온다.

 

                - 닥터 로제타 셔우드의 일기 중에서 -

 

 

 

                                               1월      대동서시(감리교 서적 판매서점) 개점

                              1013일 닥터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와 벵겔 양, 입국

 

 



복음과 치료의 역사

  

  

   닥터 로제타 셔우드의 일기

 

   1890112일 월요일

  상쾌한 아침이어서 매우 기분이 좋다. 우리는 곧 서울의 관문인 제물포에 닿는다. 육지와 바다를 통한 긴 여행은 이제 끝나고 내가 몸 담아 일해야 할 밝은 아침의 땅(Land of the Morning Brightness)’에 도착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배가 제물포에 닻을 내렸다. 만조가 아니어서 육지에서 약 3마일 떨어진 거리에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전 10시 경이 되니 로드웨일러 양이 보트를 타고 배까지 마중을 왔다. 잠시 후에는 우리도 보트를 타고 그녀와 함께 해안으로 나갔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마침 왕비의 장례일이었다(이하 생략)

 

봉선 오마니 사라와 귀수의 이야기  

 

  병원의 보조원인 사라는 흰 조선옷을 입고 내 옆에 서 있다. 그녀는 여감독 겸 간호원이다. 우리는 그녀를 봉선 오마니라고 부른다. 이는 애기 이름이 봉선으로, 봉선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조선의 여성들은 자기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또 한 여자는 요리사이다. 그리고 군인 복장을 하고 다니는 귀수는 우리의 신용할 만한 오른팔이다. 시장 보기, 돈을 바꾸는 일 등 모든 것을 다 한다. 그가 없다면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귀수와 봉선 오마니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정직하게 일하는 기독교인들이다. 봉선 오마니는 환자들에게 한글 성경을 읽어 주며 함께 기도한다. 최근에 조직한 여성교회의 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며 기동할 수 있는 환자들을 부축해서 데리고 나온다.

 

   삶을 나누는 사랑

   -화상을 입은 소녀에게 닥터 로제타의 피부를 이식함

 

   한 소녀 환자가 약 100여 리 떨어진 시골에서 가마를 타고 왔다. 이 소녀는 몇 년 전에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었다. 조선에서는 여자가 16세가 될 때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집안의 큰 흉이 되어 체면이 손상된다. 이 소녀는 성격이 밝고 아름다웠는데도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은 손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 소녀를 입원시킨 후 에테르로 마취시키고 수술을 했다. 수술한 손가락마다 붕대를 따로 감고 즉시 손가락들을 펴서 부목을 대고 단단히 맸다. 방부처리를 하고 시술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환자의 체온도 섭씨 37.2도를 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에 남아 있는 피부를 늘여서 상처를 덮었으나 피부가 모자라서 보기 싫은 흉터가 남게 되었다.

  식피수술을 하기로 했지만 통역할 사람이 없어서 윤 소녀에게 이 식피수술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내 몸에서 피부를 떼어낸 다음 환자의 몸에서 필요한 피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환자는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술을 도와주고 있던 봉선이 오마니조차 내 뜻을 알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내 몸에서 피부를 더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 두 여자는 한사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말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상처를 잘 싸매고 그 다음날까지 기다렸다가 로드웨일러 양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이런 방법으로 식피를 하지 않으면 상처가 아무는 데 매우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그들에게 설명해 달라고 했다.

  로드웨일러 양과 벵겔 양이 자기들의 피부를 떼도록 허락했고 학교에서 말괄량이로 불렸던 봉업이도 팔을 내밀고 피부를 떼라고 했다. 이 소녀는 어찌나 용감했던지 한번도 움찔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환자인 윤 소녀도 자기 몸에서 피부를 떼게 했고 누이덩생을 찾아왔던 그녀의 오빠도 피부를 제공했다. 그래서 한 번에 서너 개의 피부를 붙였고 통틀어 30여 개의 식피수술을 했다. 그 중 8개의 식피수술이 성공하여 흉터가 거의 가려져 상처가 다 아물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는 퇴원을 허락했다. 가족들은 무척 기뻐했다.

  (중략)

  윤 소녀는 입원하고 있는 동안 이화학당의 기도시간에 매일 저녁 참석했고 주일학교에도 나갔으며 누가복음은 두 번이나 통독했다. 하루는 봉선 오마니가 외출 중이었는데 병원의 대기실에서 윤 소녀가 대신 환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퇴원하는 날, 그녀는 우리와 함께 번역한 누가복음과 다른 책자들을 가져갔다. 하나의 좋은 결실을 가져올 씨는 심어졌다고 생각한다.

 

 

김점동에 대한 이야기(1)

 

  1876년 서울에서 가난한 선비 김씨 가문에 세 번째 딸 점동이가 태어났다. 당시에는 조선에 선교사들이 없었다. 점동이가 5~6세가 되었을 때 또 네 번째 딸이 태어났다. 그들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낙심하였다. 그래서 비록 그들은 가난했으나 가까운 친척의 아들 한 명을 양자로 삼았다. 그 후 오래되지 않아 1885년에 몇몇의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왔고 김씨가 살고 있는 곳 근처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자 김씨와 그의 양아들이 모두 선교사 중 한 분인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서 고용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크랜튼 대부인이 여성 해외선교회를 통하여 문을 연 이화학당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김씨는 그의 딸들 중에 한 아이를 넣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곳에서 쌀과 의복을 얻게 될 것이며 아마도 새로운 교리를 배울 것인데, 그것이 그 아이에게는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점동이는 다행히 선택된 자가 되었고, 조선의 소녀들을 위해 일찍이 설립 된 학교의 초기의 한 학생이 되었다. 점동은 깨끗한 마음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 때문에 은밀하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1년 가까이 그 학교에 있었을 때 예년의 장마철이 돌아왔다. 그리고 비는 예전보다 더 억수같이 쏟아붓는 듯이 보였다. 어느 날 밤 점동은 자기의 방에 누워서 밖에서 나는 심한 빗소리를 듣고 있을 때 아마도 주님께서 노아의 때에 그러했던 것 같이 백성들의 죄를 홍수로 심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방금 깨달은 이 생각을 자기 반 한 친구에게 알렸다. 그랬더니 그 친구도 방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점동이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고 제안하였다. 하나님께 그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 분께 그들의 죄를 없애 주시고 깨끗한 마음을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의 마음을 채웠다. 그들에게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그들은 편안히 잠들었다.

  그리고 점동이는 다른 이들에게 그녀의 마음에 찾아온 변화에 대해서 말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모임을 가졌다.

  1890년 점동이가 14세 되었을 때 닥터 로제타 셔우드가 여선교회의 병원과 시료원에서 의료사역을 담당하도록 미 여성 해외선교회에 의해 조선으로 파송 받았다. 그녀는 조선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언어에 대한 지식도 없이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때에 점동이는 덕터 셔우드의 통역을 위해 2~3명의 친구들과 함께 병원으로 보내졌다. 닥터 셔우드는 그 소녀들에게 생리학을 가르쳤고 후기 식물의학을 가르쳤다. 매일 그들은 약을 챙기고 환자를 돌보는 것을 시료원에서 배우면서 실제적인 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어린 소녀들일지라도 매우 가치 있는 조수들이 되었다. 점동이는 처음에는 통역하는 일과 공부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연히 외과수슬을 피했다. 그러나 언청이를 위한 수술에 조력한 후에 곧 모든 것을 인식하도록 배웠고 그러한 수술을 자기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함으로 그녀의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면 자신이 의사가 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하고 결코 포기한 적이 없었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의 리버티 레지스터지 기고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