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92년 파종되는 가을보리의 씨앗들

솔석자 2016. 6. 5. 17:49


1892

파종되는 가을보리의 씨앗들

 

 

영적 성장이야말로 가장 희망적인 신호이다. 교회 인명

부에서 죽은 나무는 잘라냈으나, 최소한 구원받기를 원

한다고 표명하는  연약한 형제들은 견뎌 나가고 있다.

내가 책임진 제물포에서의 전도는 지난 1년 동안 계속

되었다작년 후반부터  작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한 사람을 준교인으로 받아들였고 내가

떠난 후  여러 명이 영입되었다제물포는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감리교는 전국각지에서 현 상태를 개

선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할 소임을 다 해야

                                      한다.

 

                                                                      - 아펜젤러의 연례보고서 중에서 -

 

 

 

                              32~418일 닥터 홀과 존스 선교사, 북쪽 전

                                                    도여행

                              523일 감리교, 장로교 공동위원회 선교협정

                              430일 존스부인(Mrs. G. H. Jones), 제물포 영화

                                        학당 시작

                            1225일 동대문교회 시작

 

 

 

백핼난 전도사에 대한 이야기

 

  백핼난 전도사는 황해도 곡산(谷山) 태생으로 일찍이 소년과부가 되었다. 1889년 어린 남매를 양손에 잡고 슬픔과 낙담에 젖어 새 삶을 개척해 보고자 힘없는 발걸음을 서울로 옮겼다. 참으로 박복한 여인이었다.

  어느 날 소년과부 백핼난은 품팔이라도 할까 하여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우연히 상동 시병원 앞을 지나게 되어 그 병원 안을 기웃거리는데 마침 서양부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서양부인은 스크랜튼 대부인이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스크랜튼 대부인의 제자가 되어 그의 성경반 학생이 되었다.백부인은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중에 전혀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녀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만이 체험하는 기쁨에 가득 찼다. 그래서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깨달은 도리를 자기와 같은 몽매한 여인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전도의 사명감에 불타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잡힌 자만이 체험하는 놀라운 변화였다.

  스스로 운명을 저주하고 두 아이와 더불어 차라리 구차스러운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마음 먹었던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이제 그녀는 전도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1892년 가을에 제물포의 전도부인으로 파송받게 되었다. 그때는 아직 전금령이 채 풀리지 않은 때이니만큼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에는 흡사 돌짝밭과 같은 풍토였다. 그러나 백전도사는 전도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는 부임하자마자, 방물장사를 가장하여 바늘과 실, 물감 등을 가지고 다니면서 불철주야로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전도에 힘썼다. 그녀는 안방 깊숙이 갇혀서 한낱 시종살이에 불과하던 아낙네들에게 한 인간으로서의 눈을 뜨게 하고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며 미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여호와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었다.

  그후 힐만(M.R. Hillman) 여선교사와 존스부인(Mrs. G. H. Jones) 등과 더불어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94년에는 여회당 4칸 반을 자력으로(26) 지을 정도로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이는 한국 감리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리교회 100년사], p.113~116)

 

 

 

이 드루실라 경숙 전도사에 대한 이야기

 

  이화학당 로드웨일러와 함께 동대문 예배처를 도운 드루실라는 1851년 충청도 홍성에서 한 가난한 선비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5세에 결혼하였으나 곧 과부가 되었다. 그후 한 때 여승이 되었다가, 곧 포기하고 나와 우연히 39세에 스크랜튼 부인을 만나 그의 비서 겸 이화학당 한글교사가 되었다. 그녀는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어려서 한문과 한글을 배운 것이 이화학당의 한글교사가 된 비탕이었다.

  그녀는 1889년 이화학당에 들어간 지 반년 만에 세례를 받고 드루실라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1892년 동대문교회 초대 인도자를 거쳐 후에는 스크랜튼 대부인과 함께 전도로 일관 된 삶을 살았다.

 

([동대문교회 100년사], p.83)

 

 

 

평양의 선한 사마리아안 닥터 홀에 대한 이야기

 

  189212월 어느 날 닥터 홀은 평양을 떠나 서울로 돌아올 때 노상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한 사람을 발견했다. 시체 곁에는 상처가 심한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었는데 간호해주지 않는다면 이 추운 겨울날씨에 살아남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이 장면은 무대만 달랐을 뿐 귀에 익은 성경 이야기의 재판(再版)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본 순간 닥터 홀은 여기에 말려들지 말고 그냥 지나가자는 강한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시간과 돈은 모자라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는 우선 부상자에게 응급치료를 해 준 다음 짐을 실었던 나귀에 그 사람을 조심스레 태우고는 그날 아침에 떠났던 여관을 향하여 길을 되돌아갔다.

  여관에 도착한 그는 여관 주인이 부상한 사람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도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여관에 들여놓는 것조차 거절하는 것을 보고 놀랍고 분개했다. 간절한 설득과 힘든 흥정 끝에 주인은 마지 못해 부상자가 묵을 방을 내놓았다. 그는 여관을 나서면서, 나중에 평양 가는 길에 여관에서 약속을 잘 지켰는지 확인하겠다고 다짐했다.

  갖고 있던 돈은 모두 여관 주인에게 주었으므로 닥터 홀은 이제 초라한 음식이나마 하루에 한 끼밖에 먹을 수 없었다. 그는 강도에게 습격을 받게 된다 해도 빼앗길 게 없어 잘 됐다고 억지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먼 길을 걷느라 지쳐서 곧 길바닥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때 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한 일본인 의사를 만났다. 북쪽지방을 탐사 여행 차 오고 있었던 일본인 의사는 닥터 홀에게 있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었다. 그 일본 의사는 원래 샛길을 통해 여행할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했다면 닥터 홀은 그를 만나지 못했을 게 틀림없었다. 빈 지갑에는 다시 돈이 들어왔다. 몸도 마음도 새 힘으로 충만하여 그는 여행을 계속했다.

 

(닥터 홀,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p. 95,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