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94년 모진 핍박에도 살아남다

솔석자 2016. 6. 9. 05:20

1894년
모진 핍박에도 살아남다
     
     
래방비장 신덕균씨가 분부하되 “너희들을 죽일 터이로
되 내 용서하고 물어 볼 말이 있노라.  너희가 이제라도
나가서   도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욕하면 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고 하나 씩 물을세 처음  김
호세에게  물으니 하나님을 욕하고,  또 홍종대에게 물으
니  하나님을  욕하고,  또  한석진에게 물으니 욕하고 그
다음  내게  왔노니 내  마음이  대단히  분하고 원통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욕할 수 없다” 하니  그 놈들이 좌우에
서  대단이 때리며 “욕하라” 하며  무수히 난타함에 신덕
균씨가  “내보내라” 하니  문 밖으로  끌고  나옴에  마침
교우의 도움으로 도망하여 왔소.
     
   - 아펜젤러의 보고와 닥터 홀의 [조선회상] 중에서 -
     
     
     
                                         4월   1일          홀 목사(Rev. W.J. Hall. M.D.), 격물학당
                                                                         (格物學堂-광성) 개교
                                         5월  10일        김창식, 한석진 등 8명, 평양감영에 끌려감
                                               신앙으로 모진 고문을 이김
                                         7월                      청일전쟁
                                       11월                     이승만, 배재학당 영어반 입학
                                       11월  24일      닥터 홀, 소천(조선에서 만 3년 사역함)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11)
     
   상해 중서서원 교수로 있는 윤치호는 조선의 구원을 위해 도덕성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구원은 철저한 기독교사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십자가의 도리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신앙적 결단을 촉구했다.
   그는 “모든 문제는 ‘이기주의’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도덕성 회복은 ‘자기 부정’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자기 부정은 종교적 차원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런 뜻에서 도덕은 종교에 뿌리내린 것이어야 한다.
   유교가 실패한 것은 바로 이 점 곧, ‘자기 부정’에 의한 이기주의의 극복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하지 못한 데 있다. 그러므로 부활에 동참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도덕성 회복의 길이 있고, 민족을 개화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독교를 그리고 감리교를 찾았다고 고백했다.
     
   1894년 1월 1일
     
   스스로 가르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하는 종교는 무종교보다도 악하다. 이런 종교는 다만 우리들의 영적 능력을 무산시키고 새로운 진리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 뿐이다.
   나는 모든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를 선택한다. 기독교는 그 가르치는 바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중에서도 개신교를 선택하는 까닭도 그 성취 능력 때문이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가르치는 종파 중에서도 감리교회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들이 목적한 바를 실천하고 성취하기 때문이다.
     
(윤치호의 일기)
     
     
김점동에 대한 이야기(4)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김점동 에스더는 이제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홀부인의 사역에도 아주 유용한 존재가 되었다. 에스더는 존스부인과 헐버트부인의 친절한 가르침 아래 기악연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 오르간으로 시료원의 주일 오후예배에 사용되는 몇 가지 찬송를 반주할 수 있게 되었다. 에스더는 또한 이 모임의 유능한 지도자로 입증되었다. 에스더의 의료 훈련은 멈출 줄 몰랐다.
   에스더는 시료원의 모든 약품의 라틴어 명칭에 익숙해졌고 대부분의 처방들을 조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외과수술에서 마취제를 다루는 것을 배웠고 가끔 일손이 부족할 때 에테르 마취제 추를 잡고 다른 손으로 상처를 해면으로 닦았다. 그래서 에스더는 1년에 6,000건의 시료원과 병원의 실습에서 만나는 질병 대부분의 형상과 학술 명에 친숙하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자기의 가족이 수 세대를 살았던 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홀부인이 에스더에게 만일 그녀가 예수님을 위해 고향에서 수백 리 떨어진 평양에 갈 수 있는 지를 물었을 때 에스더는 “주님께서 저를 위해 문을 여시는 곳이라면 저는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만일 그 분이 평양에 문을 여시면 저는 갈 것입니다. 제 몸과 영혼과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저의 영혼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를 죽일지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기 위해 저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줄 것입니다. 저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에스더와 그의 남편 박유산은 1894년 4월에 닥터 홀 부부와 함께 평양으로 갔다. 그들은 뒤에 김창식과 오석형이 다른 기독교인들과 옥에 갇혀 사흘간 심한 박해를 받을 때 아주 용감하게 대처함으로 그들이 평양에서 신실한 조력자임이 증명되었다.
   후에 박해가 진정되었을 때에 에스더는 ‘조선의 소돔’이라 불리우는 이 10만 도시의 부인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첫 번 째 기독교 사역을 개시함에 있어 홀부인을 효과적으로 도와주었다. 대단히 흥미롭고 성공적인 사역을 한 한 달 후에 전 대원은 전쟁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 후회하기보다는 훨씬 많은 보람을 느끼며 감사했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리버티 레지스터 기고문] 중에서)
     
     
조선의 바울 김창식에 대한 이야기(1)
     
  * 편저자주 : 아펜젤러의 보고서와 평양에서 함께 고난을 겪었던 닥터 홀과 그 부인의 일기는 조선의 바울이라고 불리우는 김창식의 회심과 박해 그리고 1894년 5월 10일과 11일에 있었던 투옥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해 주었다.
     
   회심
     
    김창식은 올링거의 개인교사의 돈을 발견하고 그것을 돌려준 것을 계기로 그 후 그들의 일꾼으로 채용되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꾼’이었으나 차차로 탁자와 의자를 구별하기 시작했고, 창문과 문, 그리고 양탄자와 냅킨의 차이를 알아듣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 집안에 있는 성경들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한 상태였으나, 결국 자기의 것으로 한 권을 얻게 되자 비로소 편안한 마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성경은 그가 괴로워했던 것에 대해서 지혜와 하나님의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또한 그는 마음에 고통을 느꼈는데 점점 그 고통은 더해 갔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가 늘 생각해 온 모습만큼 자신이 그렇게 선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께 기도했으며,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마음에 있던 고통이 사라져 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나(아펜젤러)에게서 세례를 받고 우리 교회(정동)에 등록했다.
   그는 요리사로 승진되었다. 그의 성경(신약)은 종종 밀가루가 자욱히 덮인 채 빵 굽는 판의 한쪽 끝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기도회를 열었다.
   1893년 그는 요리사에서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1894년 봄에 닥터 홀과 함께 평양으로 갔다. 그러던 중 5월 10일 평양에 있는 닥터 홀로부터 놀라운 전보가 왔다.
  “김씨, 투옥 중, 가족들과 하인들의 보호 요망.”
     
(1894년 아펜젤러의 메모 중에서)
     
   박해와 투옥
     
   “5월 9일, 우리는 저녁기도를 한 다음 평화스런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2시경 기독교 신자인 오씨와 이씨가 찾아와서 우리를 깨웠다. 그들은 믿음이 좋은 창식이가 감옥에 잡혀 갔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창식이는 닥터 홀이 서울로 돌아가고 없을 때도 이곳에 남아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 집의 전 소유주인 김씨, 모페트씨에게 집을 판 조선인, 또 모페트씨 대신 설교하고 있었던 한씨도 잡혀 갔다는 것이다.
   새벽 1시 쯤 어떤 사람이 창식이의 집 창을 두드리며 닥터 홀이 보낸 사람이니 문을 열어 달라고 해서 문을 열자 이 지역 담당 관리의 부하들이 들이닥쳐 창식이를 잡아갔다는 것이다. 창식이는 잡혀가 매를 맞고 칼을 쓴 채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관리들은 오늘 아침에 다시 창식이를 곤장으로 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금 후에 창식이의 아내가 왔다. 관리들은 감히 ‘닥터 홀에게는 매질하지 못하므로 대신 창식이를 가두고 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침 6시 30분에 닥터 홀은 감사와의 면회를 신청했다. 7시 30분까지 기다렸으나 하인들은 감사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만나 주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닥터 홀이 관청에 가 있는 사이에 관리들이 찾아와서 엽전 10만개를 내면 아침에 창식이가 맞을 매를 감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돈을 집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사이에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왔다. 창식이는 칼을 너무나 조여 놔서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씨는 닥터 홀과 함께 집에 왔었는데 닥터 홀이 잠시 집에 들어간 사이에 우리 집 마당에서 군졸들에게 잡혀갔다. 그는 도둑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혀 있다. 닥터 홀은 서울에 있는 닥터 스크랜튼에게 전보를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창식이 구금 됨. 오씨와 모페트의 한씨 구타당함. 세 가옥의 전 소유주들 모두 구금 됨. 이곳 가족과 하인들의 보호 요망.’
   그리고는 감사와의 면담을 위하여 다시 관청으로 갔다. 닥터 홀은 중국 전신소의 영어통역인과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감사와 면담하는 데 통역을 부탁했더니 그는 고맙게도 응낙해 주었다. 닥터 홀은 오전 11시와 오후 2시 사이에 감사를 만나러 갔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우리를 구경하러 오는 부인들과 아이들은 10명 씩 또는 12명 씩 조를 짜서 온종일 오고 있다.
   구경꾼들이 북적대는 중에 불쌍한 창식이가 군졸에게 끌려 집으로 왔다. 군졸들은 엽전 10만 개를 내놓지 않으면 또 곤장을 치겠다고 돈을 요구했다. 조금 있자 오씨도 끌려왔다. 그는 매우 기상이 높아서 관리들이 곧 자기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으로 믿고 있어서 내가 돈을 지불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창식이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는 이미 오씨보다 오래 갇혀 있어서 족쇄와 수갑이 조이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용기가 꺾여 있는 듯 했다. 오후 1시 경에 행정관의 부하 한 사람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그는 한문으로 쓴 종이를 주었다. 에스더는 전에 내게 조선인 관리들은 우리가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 종이가 우리를 쫓아내는 명령서일 것으로 짐작되어 나는 문서를 읽을 줄 모르므로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문서를 대문에 붙여 놓고 갔다. 닥터 홀의 친구가 그 문서를 번역하여 주었다.
     
   ‘이것은 감사 다음으로 높은 행정관이 쓴 것으로 이 지역 담당관 김씨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집은 전 주인에게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이는 이미 오래 전에 내렸던 명령이다. 닥터 홀이 그의 아내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은 여기에서 오래 살겠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전 주인은 즉시 이 집을 반납 받아라. 많은 구경꾼들은 큰 환난을 초래한다. 고로 환자들만 그곳에 갈 수 있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근접을 금한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해악이 되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설교를 듣지 못한다.'
     
   문서는 관인이 세 개 찍혀 있었다. 이 문서가 잘못되어 나에게 전달된 것인지 혹은 이 지역 관리가 읽고 난 뒤에 나를 겁나게 하려고 보낸 것인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오후 2시에 닥터 홀은 집에 돌아왔다. 닥터 스크랜튼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공사관 곧 움직이겠음. 자세한 말 전보로 불가능’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닥터 홀은 다시 전신을 보냈다. ‘모페트와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감옥에 갇혔음. 이유 설명 없음. 감사는 면회, 청원, 보호를 거절함. 집을 반납하라는 명령을 받았음.’
   닥터 홀은 다시 서둘러 나갔다. 감사는 중국인 통역으로부터 닥터 홀이 서울에 전신을 보냈던 일과 앞으로 전신을 더 보낼 것이라는 말을 듣고도 계속 만나기를 거절하고 있다.
   오후 4시, 닥터 홀은 총영사 가드너(Gardner)씨로부터 온 전보를  가지고 왔다.
   ‘조선 외무부의 관리에게 조선인 하인들을 석방하라는 지시를 전보로 쳐 주기를 요청하겠음.’
 
  이번에는 감옥에서 일하는 자들이 집으로 와서 다시 돈을 요구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감금된 사람들 모두 다시 매를 맞을 것이라고 했다. 뒤따라 이 지역 담당관 김씨의 하인이 집으로 와서 대문에 붙여 놓았던 문서를 도로 달라고 요구했다. 닥터 홀은 그 문서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우리로서는 그 문서가 누구에게 내리는 명령서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 문서를 보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문서를 달라고 왔을 때는 닥터 홀이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날 아침에 오라고 말했다. 닥터 홀은 누구를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졸라댔다. 닥터 홀은 결국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문서를 가져가지 않으면 상관인 김씨에게 심한 매를 맞게 된다고 설명했다. 담당관 김씨는 그 문서를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그 종이를 주지 말라고 했다. 물론 담당관 김씨는 부하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종이를 반드시 가져오라고 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간 후에 곧 미친 소가 울부짖으며 땅을 박차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담당관 김씨였다. 그는 지난번 여기에 왔을 때에 닥터 홀의 조수인 노병선씨를 회초리로 때렸었다. 그때 노씨는 그를 사람이 아니라 돼지라고 했을 정도였다.
   닥터 홀은 차근히 이야기하려고 애썼으나 그는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처럼 펄펄 날뛰는 사람은 처음 봤다. 꼬마 셔우드는 그때 자고 있었는데 그 소동에 잠이 깼다. 박유산도 마당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집안에 숨어 있었는데 그대로 숨어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담당관 김씨는 유산을 보자 그가 의사의 하인 중 한 사람이라고 지적하더니 즉시 달려들어 그의 상투를 잡고는 발로 차고 심하게 때렸다. 닥터 홀은 이 끔찍한 난동의 이유가 그 종이 문서 때문이라는 점을 알았다. 박유산도 매를 맞으며 그 종이를 주어버리라고 애청했다. 결국 그 종이를 주자 사탄과 같은 김씨는 만족해서 돌아갔다.
   오후 8시, 실(Sill)씨로부터 전보가 도착했다. ‘영군 총영사와 나는 모페트와 당신에게 속한 조선인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즉시 내려 달라고 조선외무부에 계속 강청하고 있음. 그리고 사실과 이유를 들어 조약에 의거한 당신들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음.’ 동시에 모페트씨로부터 친절한 전보가 왔다. ‘여호수아 1장 9절, 이 구절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전해 주시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우리는 기도하고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내 방의 뒤 쪽에는 종이를 바른 작은 창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앞에 침대가 놓여 있다. 닥터 홀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수 있게 창을 열어 두었는데 창에 엷은 커텐이 쳐져 있었으므로 나는 이 창이 열린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창 앞에서 옷을 벗느라고 서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돌멩이 하나가 날아왔다. 방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누군가가 밖에서 돌을 던진 것이었다. 창 앞에 놓인 항아리가 깨졌다. 마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처럼 커서 집안사람들이 다 놀라 일어났다. 돌멩이가 얼마나 더 날아들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급히 닥터 홀의 방으로 뛰어들면서 실비아에게 빨리 애기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닥터 홀이 창문을 닫았다. 돌멩이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만전을 기하느라고 두터운 이불을 창에다 막고 나서야 모두들 잠을 잘 수 있었다.
     
   5월 11일 아침 7시, 감사가 보낸 심부름꾼인 담당관 김씨의 아들이 와서 서울에서 감사에게 전보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미국의 서울 주재 공관장들이 국왕을 알현했는데 평양은 복음을 전파할 장소가 아니라는 점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국왕이 말씀하시기를 ‘닥터 홀은 나쁜 사람이니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오늘 다 참형에 처하라고 감사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그 말이 거짓말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창식이를 절도범 감방에서 사형수 감방으로 옮기고는 칼을 또 씌워 놓았기 때문에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닥터 홀이 창식이를 면회하러 갔을 때 그는 용기를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군졸들은 그를 계속 심하게 매질하고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했다. 이 불쌍한 친구는 백 번 이상 죽는 듯한 큰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설사 서울에서 전보로 석방명령이 감사에게 내려진다 해도 석방을 일부러 늦출 승산이 컸다. 나는 창식이가 석방되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닥터 홀은 그를 면회 갈 때마다 운다. 정말로 소름끼치는 일이다. 창식이가 오씨나 한씨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고 있는 이유는 관리들이 그에게 만일 석방시켜 주면 또 예수를 전도하겠는가 물었을 때 그는 ‘석방되어도 예수를 전교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조선의 바울, 하나님께 영광을!
  닥터 홀은 또 전신국으로 갔다. 박유산이 그가 보는 앞에서 구타당한 일, 감사의 심부름꾼이 말한 내용, 구금된 사람들이 석방은커녕 오히려 사형수 감방으로 이감된 사실 등을 전보로 쳤다.
   오전 9시, 이 구역 담당관리는 우리에게 물을 길어 줄 경우 태형을 받을 것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평양에는 우물이 없어 약 반 마일 떨어진 강에서 물을 길어 와야 한다.
   예수를 전도한 죄로 창식이와 한씨가 오늘 사형을 당한다는 말이 계속 나돌고 있다. 우리가 데리고 있는 조선인들은 모두들 풀이 죽어 평양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
   오늘 정오 우리가 서울로 보낸 전보에 대한 답장이 가드너 영사로부터 도착했다.
   ‘어젯밤 11시에 조선정부의 외무부에서 모든 조선 고용인들과 기독교신자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전신으로 평양에 발송했음.’
   닥터 홀은 다시 감옥으로 갔다. 포졸들은 아직도 수감인들을 매질하면서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감사가 그 전보를 받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사에게 우리가 동학의 일당이고 조선의 방방곡곡에 집을 지어서 동학을 돕는다고 보고를 했기 때문에 이 점을 서울에 전보로 보고한다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또한 감사는 왕비의 친척이므로 전보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벌을 준다 해도 겁날 게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닥터 홀은 가드너 영사에게 답신 전보를 보냈다.
  ‘관리들이 물의 공급을 중단시켰음. 수감자들을 석방하지 않음. 우리를 동학이라고 함.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어떤 특별한 조치가 더 없는 한 창식이와 한씨는 처형을 받을지 모름.’
   오후 4시에 닥터 스크랜튼으로부터 전보가 도착했다.
   ‘그들은 감히 사형을 집행하지 못할 것임. 외무부에서 두 번이나 석방명령을 보냈음. 외무부장관과 영국영사 지금 회동 중, 두 사람을 곧 만나겠음. 매일 세 번 이상 전보 보내겠음.’
   곧이어 감사에게 내린 명령이 담긴 전보가 또 하나 도착했다. 전문의 내용은 ‘즉시 수감자를 석방하라. 석방여부 보고 바람. 만일 석방하지 않으면 문책이 있을 것임.’ 이어서 또 전보가 왔다.
   ‘모페트 외 맥켄지 금요일 그곳으로 출발, 3일 후 도착 예정, 감사가 미국과 영국을 무시하지 않는 한 겁낼 것 없음.’
     
  거룩한 승리
     
   닥터 홀이 전신소로 가고 없는 시간인 6시 경에 행정사법관이 감금한 모든 남자들을 자기 앞에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때의 일을 김창식의 글을 통해 더 생생하게 알아 본다.
     
   “래방비장 신덕균씨가 분부하되 “너희들을 죽일 터이로되 내 용서하고 물어볼 말이 있노라. 너희가 이제라도 나가서 도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욕하면 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고 하나씩 물을세 처음 김호세에게 물으니 하나님을 욕하고, 또 홍종대에게 물으니 하나님을 욕하고, 또 한석진에게 물으니 욕하고, 그 다음 내게 왔노니 내 마음이 대단히 분하고 원통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욕할 수 없다’ 하니 그놈들이 좌우에서 대단이 때리며 ‘욕하라’하며 무수히 난타함에 신덕균씨가 ‘내보내라’ 하니 문 밖으로 끌고 나옴에 마침 교우의 도움으로 도망하여 왔소.”
  오후 7시 경 불쌍한 창식이가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와 마루에 쓰러졌다. 그는 말할 힘도 없었고 극도로 지쳐서 몸이 축 늘어져 덜덜 떨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석방되어 오는 도중에, 감사의 심부름꾼이며 이 구역 담당관 김씨의 아들이기도 한 자의 명령으로, 사람들로부터 줄곧 돌멩이를 맞으면서 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약을 먹인 다음 조용한 방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닥터 홀은 곧 돌아왔다가 모두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전보로 알리기 위해 다시 전신소로 갔다.
  밤 9시 경이 되자 창식이는 차도를 보였다. 음식도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사법관은 수감자들을 석방하면서 ‘절대로 복음을 전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수감자들은 죽음을 면하는 길은 그 말에 응해주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다 오랫동안 받은 고문으로 마음이 약해져 있었고 또 가족들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주저한 끝에 베드로같이, 사법관의 요구에 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식이만은 그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나쁜 종교라고 말하지만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기독교 신자로 살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도 이를 전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사법관은 계속 예수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라고 명령했으나 창식이는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문에 사법관은 창식이를 석방하면서 그에게만은 사람을 딸려 보내지 않았다. 이때 김씨가 창식이를 돌로 쳐죽이라고 말해 거리의 소년들과 남자들이 우리 집에 도착할 때까지 따라오며 계속 돌로 쳤던 것이다. 곧이어 오씨가 도착했다. 그는 석방되자 먼저 자기 집에 갔다가 왔다. 그의 아내는 몹시 앓고 있었다. 원래 몸이 좋지 못한 그녀가 얼마 전에 쌍둥이를 낳았는데 더구나 이번 사건으로 엄청난 쇼크를 받아 완전히 몸져누워 있었다.
  이씨와 김씨라고 불리우는 젊은 사람이 집으로 왔다. 이 두 사람은 이번 사건 중에 계속 용감하게 닥터 홀 편에 선 사람들이다. 또 소년들도 찾아왔다. 모두 함께 예배를 드렸다. 창식이가 사도행전 16장을 읽으면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다. 닥터 홀은 창식이의 발아래 꿇어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예수를 위해 고난 받은 신앙인을 볼 수 있다’는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귀한 은혜라고 말했다.”
     
    노블(W.A. Noble)씨는 그 당시 닥터 홀이 보낸 전신을 받았을 때의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업무를 다 제쳐 두고 모든 선교사들이 서울에 모여 기도를 했다. 각자 이 위기가 자신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 두 사람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닥터 홀로부터 ‘모두 석방됐음. 창식, 심한 상처를 입었음’이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선교사들은 신앙인 닥터 홀 내외가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깊고도 엄숙한 사실을 실감했다.
     
(아펜젤러의 보고서와 닥터 홀의 [조선회상] 중에서)
     
     
오석형의 딸 봉래에 대한 이야기(1)
     
  홀부인의 고귀한 신앙적인 봉사
     
   평양에서 닥터 홀의 첫 신자가 된 사람은 오석형이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사람들 중 하나로 맹인인 어린 딸이 있다.
   홀부인의 환자 중에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들이 많았다. 조선에서 그들은 매우 처참한 상태에 있었다. 장님들은 점쟁이나 무당이 되지만 그것도 부모들이 돈이 있어서 그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처지가 되어야 가능했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소외되어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해 결국은 보행능력까지도 잃게 된다(중략).
   홀부인은 오씨의 딸이 장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곳에서 일을 시작할 기회가 비로소 왔구나. 그 애의 아버지는 기독교인이니 내 의도를 왜곡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홀부인은 일기에 “나는 봉래를 가르치기 위하여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점을 찍어 일종의 점자를 고안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봉래는 총명했다. 거기다 높은 열성을 가지고 좋은 반응을 보였다. 홀부인은 맹인을 교육시킬 수 있는 지식이 있으면 봉래에게 점자를 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장님들은 이 세상에서 쓸모없다는 세간의 그릇된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맹인교육이 시급했다.
     
(닥터 홀, [조선회상], p.117)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1)
     
   깨닫지 못한 부르심
     
   이승만이 세 살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평산에서 서울의 도동으로 이사하여 1895년도까지 도동의 동산 비탈 곁에 있는 조그만 초가집에서 살았다.
   이승만은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등의 순으로 한문을 공부하면서 자랐다. 그는 13세 때 과거(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18살 되기 전에 중용, 논어, 맹자, 충추, 시경 및 주역 등을 모두 떼었다.
   그는 19살이었던 1894년 그와 동문수학하던 신긍우 형제의 권고를 받아 11월 배재학당 영어반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자세한 상황을 1912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감리교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그곳 신문에 기고한 그의 글을 통해 살펴본다.
     
  유가에 태어난 나는 중국고전과 역사, 문학, 종교 등에 관한 책들을 습득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것을 나의 의무로 여겼고, 유교만큼 훌륭한 종교는 없다고 믿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또 생일 때마다 나를 서울 근처에 있는 큰 절인 되무개에 보내어 장수다복을 빌도록 하곤 하였었다. 유교가 윤리나 정치적 원리를 다루는 데 비해 불교는 많이 달라졌고 영적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이처럼 암흑 속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동안 조선 땅에는 새 시대의 동이 트고 있었다. 외국 공관들이 세워지고 외국어학교들이 정부에 의해 설립되었을 뿐 아니라 외국 선교사들이 서울 장안에서 예수를 찬미하고 그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당을 떠나 새 것을 배우러 간 친구들을 반역자로 취급하고 있던 나에게 친구들이 때때로 놀러 와서 전보, 철로, 비행기 등등 서양에서 발명된 기괴한 것들에 대해 배우라고 역설했지만 나는 “천지는 개변해도 나는 어머니의 종교를 버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일축하곤 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우리나라로 하여금 동양의 구 세계는 현대문명의 광범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 낡아 빠지고 많이 악용되어 오던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는데, 이 조치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 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가장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였다. 그런데 진보당 정권은 여러 학교를 세우고 관비로 운영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외국어를 배우고 서양문물을 배우도록 온갖 장려를 하고 설득을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을 하던 끝에 배재학당에 가서 영어를 배우기로 작정하였지만 며칠간 나의 작정한 바를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하의 몹쓸 교리’를 가르치는 학당에 나가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학당에 갔더니 노블(Noble)씨가 아침예배에 참석하라고 했다. 그는 내가 난생 처음으로 말을 건넨 외국 사람이었다. 이익재에게 물어보니 학생들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하게 되어 있어서 나도 참석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거기서 우리에게 무언가 먹고 마시게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박장대소하고는 그럴 위험은 없다고 일러 주었다.
  예배실에서 나는 뒷줄에 앉아서 그 반에 있는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키가 큰 아펜젤러씨가 강단에 서서 청중에게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는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려고 갔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고 또 내 마음 속에 깊이 느껴진 것은 1900여 년 전에 죽었다는 사람이 나의 영혼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혼자서 생각했다. ‘아니 그래, 저렇게 놀라운 일들을 한다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 바보같은 교리를 믿는단 말인가. 아마 저 사람들은 자기들은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 그저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 왔는가 보다. 그러니까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만 교회에 가는구나. 위대한 부처를 알고 공자의 지혜를 아는 유식한 학자야 어디 저런 교리를 믿을 수 있는가?’
  이렇게 결론을 지은 나의 마음에 편안을 느꼈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알려 드렸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 붙들고 “아가야, 너는 천주학꾼이 되는 거지? 그렇지?” 하셨다(나의 모친은 독자인 나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내가 19살 날 때까지 ‘아가’라고 불렀다). “아니야요, 어머님,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 총명해요. 어디 배운 선비가 그들의 교인이 되는 것을 보신 일이 있으세요?”라고 하였더니 어머니는 약간의 안도감을 갖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 후에 곧 내가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것을 보시게 되었다.
     
([이승만의 글 모음] 중에서)
     
     
김점동에 대한 이야기(5)
     
    평양에서 남편 박유산과 함께 조수로 닥터 홀을 도우면서 병원과 전도사역에 열심을 다하던 점동이 에스더는 그를 끔찍이 아껴주고 사랑하던 닥터 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비탄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으로 돌아가는 홀부인에게 자신도 미국으로 같이 가서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간청을 했다.
   홀부인은 에스더가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의학공부를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청을 응낙했다. 선교회에서도 수락했고 친구들도 약간의 경비를 모아 주었다. 그러나 에스더를 남편과 너무 오랫동안 헤어지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홀부인은 두 사람을 다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홀부인과 박씨 부부는 서울에서 친구들과 작별하고 1894년 12월 7일 파란만장했던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제물포에 도착하였으나 홀부인의 아이 셔우드가 갑자가 병이 나서 일주일을 머물다가 12월 13일 제물포를 출발하여 12월 16일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고 가까스로 미국행 차이나 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그때의 상황이 홀부인 일기에 아주 잘 기록되어 있어 소개한다.
     
   애기 셔우드를 위해 제물포 존스씨 댁에 머물며 치료하자 여행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예약한 차이나호가 이미 일본을 출발, 미국으로 떠나버리지나 않았을까 하고 홀부인은 걱정이 되었다. 일본으로 항해하는 50시간 동안 파도가 너무 심해 어른들은 멀미로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셔우드는 멀미를 하지 않았다. 다행히 항해 도중 선장의 부인이 셔우드를 계속해서 돌봐주었다.
   배가 나가사끼에 도착하기 전날 밤에 홀부인은 미국으로 떠나는 차이나호가 오후 4시에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이 꿈 이야기를 선장에게 했더니 그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항해 스케줄대로 출발했다면 이미 그 배는 떠나고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가 나가사끼에 도착하자 선장은 홀부인에게로 뛰어오면서 말했다.
   “당신 꿈이 맞았어요! 차이나호는 아직도 부두에 정박 중입니다. 오늘 오후에 떠난답니다.”
  승객들에게 심한 배멀미를 나게 했던 바로 그 폭풍 때문에 차이나호는 출범을 연기했던 것이다. 이 배는 12월 16일 일요일, 그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닥터 홀의 [조선회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