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95년 신실한 일꾼으로

솔석자 2016. 6. 10. 05:10

1895

신실한 일꾼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선교적 관심은 잠시도 그를 떠

나지 아니했다. 그는 주일마다 이미 미이미(감리)교회

예배에 참석했으며, 곳곳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공공연히 그리스도인 행세를 했다. 고위관리로서는 처

음 있는 일이요, 그만치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바람막

이가 된 셈이다.각료 안에는 윤치호 외에 감리교인 서

                              광범이 있었다.

 

                                    -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

 

 

 

                            2월            감리교 신학부 개설

                           213일    윤치호 귀국(10년 훈련)

                         10월   8일    을미사변(왕후 민비 시해사건)

                         1013일     남감리회 선교 시작,

                                         리드(C.F. Reid), 입국

                         11월            김홍집 내각 단발령 반포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2)

 

  먼저 구습을 자름

 

  조정에서 1895년 단발령을 내렸을 때 나는 자의로 단발하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아침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머리를 자르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처음에 내 말을 믿지 않으셨다.

  그러나 선조의 제단에 제사를 드리면서 단발을 하는 것은 고래의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나 세조(世潮)의 흐름에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아뢰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그 당시 나는 제중원에서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낡은 진료소에서 에비슨(Dr. Avison) 의사가 가위로 나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이승만의 글 모음] 중에서)

 

 

  영어선생이 되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이승만은 새로 온 선교사 화이팅(Georgiana Whiting) 의사의 첫 조선말 교사가 되었다. 그의 첫 월급은 은전으로 20원이었는데 그 돈이 하도 많아서그의 모친은 겁에 질릴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배재학당에서 영어교사로 채용되었다.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이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영어선생이 되었다고 하여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편저자주: 단발령(斷髮令)에 대하여

   1895(고종 32)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이다. 당시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을미사변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여 이조 개국 5041117일을 건양원년(建陽元年) 1 1일이라 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은 솔선수범히여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이 칼을 가지고 거리나 성문에서 강제로 머리를 깎고 또 일반 가정에까지 들어가서 머리를 깎게 하였다.

   그러나 을미사변 때문에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이 좋지 않던 때에 단발을 강행하니 정부의 대신들 가운데 이도재(李道宰) 같은 선비는 반대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사퇴하였으며, 전국의 유생들도 이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부에서 친위대를 파견하여 진압했으나 배일 기세는 더욱 심해졌으며, 뒤에 김홍집은 피살되고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말았다.

 


 




 

김점동에 대한 이야기(6)



 미국에 도착한 에스더(김점동)2월이 되자 리버티의 공립학교에 입학했다. 그녀의 남편 박유산은 셔우드(홀부인 친정)의 농장 일을 도왔다. 조선에서는 선교 위주의 학습이라 내용이 단순했지만, 여기서는 매달 과외비용을 지불하며 친구 집에 합숙시키거나 기숙사에 보내 공부하게 해야 했다.

  그 결과 에스더의 학교 성적은 좋은 진전을 보였다. 9월 에스더는 뉴욕시의 유아병원에 들어갔다. 일년 이상 그곳에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버는 한편 개인교수를 찾아 라틴어, 물리학, 수학 공부를 했다(박유산은 그때까지 상투를 하고 있었다).

 

(닥터 홀의 [조선 회상] 중에서)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12)

 

  1895년 새로운 정부(김홍집 내각)가 구성됨으로 윤치호는 10년간의 해외생활을 마감하고 중국 상해로부터 무사히 귀국하여 관직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선교적 관심은 잠시도 그를 떠나지 아니했다.

 

  그는 주일마다 이미 미이미(감리)교회 예배에 참석했으며, 곳곳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공공연히 그리스도인 행세를 했다. 고위관리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요, 그만치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바람막이가 된 셈이다.

 

  각료 안에는 윤치호 외에 감리교인 서광범이 있었다. 윤치호는 남감리교회가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선교사업을 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중서서원 원장 알렌(Young.J. Allen)과 캔들러 총장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캔들러는 윤치호가 조선에 와서 선교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고, 이는 사도 바울에게 마케도니아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고 청한 것과 같이 성신이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감리교 기관지에 조선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글을 썼다. 그의 논설에 감동하여 500불 상당의 공채증서를 선교부에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교부로서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그 방법론이 막연한 상태였다. 이에 대해 윤치호는 우선 그 방법을 제시했다. “즉 서울은 이미 미감리교회를 위시로 많은 교파의 선교사들이 와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남감리교회가 이곳에서 선교사업을 개시하려면 먼저 중국이나 일본에서 누군가가 와서 이곳 형편을 잘 검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남감리교회 선교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 선교사업을 관할하고 있는 핸드릭스(E.R. Hendrix) 감독으로 하여금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신학박사 리드(C.F. Reid, (李德) 선교사를 대동하고 한국을 답사하도록 했다. 리드는 1878년부터 중국에 선교사로 와서 일하던 덕망 높은 선교사였다.

 

  마침 중국 남부에서 선교하던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기후에 적응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중국 북방에 선교처를 설치하려고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 이때에 새로운 조선 선교의 기화가 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대환영하고 조선 답사에 나선 것이다. 상해를 떠난 일행은 닷새 만인 18951013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따라서 그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세상이 흉흉했다. 제물포에서 서울까지는 배로 와야만 했다. 이들의 도착 소식을 듣고 윤치호는 새벽부터 용산 선착장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도착한 배에는 그들이 없었다. 실망하고 돌아오던 윤치호는 남문 밖 젠켄스 집에 들렸다. 그런데 의외에도 핸드릭스와 리드가 그곳에 이미 와 있었다. 말인즉 오던 배가 모래에 걸려 움직이지 않게 되자 육로로 걸어서 왔다는 것이다. 리드는 이 경험을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고 자세히 보고하고 있다.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1)],p.133~134)



  

김창식에 대한 이야기(2)

 

  1894년에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은 김창식은 18952, 서울에서 시작한 신학부에서 한 달간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 되는 원리들에 대한 진지하고도 유익한 공부를 했다.

  서울에 있는 형제들 외에 강화의 이명숙, 제물포의 김기범 형제들이 그곳에서 함께 공부했다.

 

(유동식,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