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바람은 불어도 보리는 자랐다
…그러나 이 만남은 전덕기 소년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
을 미쳤고 그가 예수를 그의 구주로 영접하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전덕기 소년은
스크랜튼의 이런 인격에 이끌리어 그의 집에 자주 드나
들며 스크랜튼에게서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그리스도에
대하여 열심히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런 결심
은 곧 그의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무서운 반대에 부딪치
게 되었으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그의 결심
을 관철시켜 17세의 나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
로 굳건히 영접하기에 이른 것이다.
- 전덕기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
남궁 억 선유사(宣諭使)로 홍천의병을 선유(宣諭)
1월 1일 서재필, 귀국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배재에서 서재필)
남궁 억, 독립협회 총무가 됨
평양에서 정진학교를 세움
5월 남감리회 리드 목사, 선교기지 구입
전덕기, 상동교회에서 세례받음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13)
선교의 열정은 더해 가고
뛰어난 학식과 온갖 고난을 통한 경륜이 그런대로 갖춰진 32세의 윤치호는 학부협판 및 외부협판이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선교에 더욱 열심이었다. 마침내 1896년 5월 상해에서 선교하던 리드가 서울에 들어와 선교센터로 사용할 가옥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극성스럽게 졸라댄 윤치호의 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윤치호는 4월에 있었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전권공사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모스크바에 갔다가 오는 길에 파리에 머물러 불어 공부를 하고 1897년 정월에 귀국하게 된다. 그는 공부할 기회만 있으면 어디에라도 주저앉는 기질이 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생각된다.
(유동식,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1)], 참조)
김점동에 대한 이야기(7)
1896년 10월 1일, 우리의 점동이 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재 혼스 홉킨즈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서양의학을 공부한 최초의 조선사람이다.
닥터 코로엘 간사는 “그들은 그녀가 지적이며, 학구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첫해의 모든 학과 학점을 이상 없이 이수하였다. 그리고 3년의 전체과정을 의심 없이 이수할 것이다. 박부인(김점동)의 후원을 원하는 독지가는 메어리랜드, 볼티모아 톰슨 가 607. 스티반스 부인에게 송금할 수 있다. 본토 조선인 의사의 아주 잔인한 방법에 대해서 이미 읽은 독자는 조선에서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서구의 의학지식으로 완전히 무장하려고 하는 건전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에스더 김박을 후원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특권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라는 소개와 함께 협조를 요청했다.
(현종서,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p.198)
전덕기에 대한 이야기
소년시절과 상동교회, 그리고 세례
전덕기는 1875년 12월 18일 정선(旌善) 전(全)씨 한규씨와 임씨 사이에 출생하여 서울 정동에서 성장하였으며 원래의 이름은 봉운이었다.
그가 9세 되던 1884년 8월에 부친이 사망하고 이어서 3개월 후인 11월에 어머니마저 돌아감으로써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는 숙부인 전성여씨 집에서 기거하면서 평범한 소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17세 되던 1892년에 그가 어린 나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생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만일 그가 이때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도 평범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스크랜튼 목사를 통하여서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의 입신 과정도 극적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배타적인 탓에 선교사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설교 내용이 쉽게 조선 사람들에게 친숙해지거나 용납될 리가 없었다.
전덕기도 하루는 낮도깨비같이 생겼다고 생각한 선교사의 주택을 찾아갔다. 물론 그들의 설교를 들으러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골려주려고 간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 그 집에 돌을 던져 까닭 없이 그 집의 유리창을 박살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대한 적개심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도망가지 않고 당돌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를 보고도 그 소년은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년은 그 선교사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살기등등한 얼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천만 뜻밖에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소년의 계산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그는 이 소년에게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정히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고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까지 하였다. 이런 일은 이 소년으로서는 생전 처음 당하는 경험이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도리어 위로하면서 그 입은 피해를 불문에 부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설득력 있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돌과 같은 그의 영혼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였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이 때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소년 전덕기와 스크랜튼의 처음 만남이었다. 그러나 이 만남은 전덕기 소년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그가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전덕기 소년은 스크랜튼의 이런 인격에 이끌리어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스크랜튼에게서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그리스도에 대하여 열심히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런 결심은 곧 그의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무서운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으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그의 결심을 관철시켜 17세의 나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굳건히 영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후 1893년에 상동병원 교회가 정식으로 구역으로 승격되면서 스크랜튼이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되고 2년 후인 1895년에는 상동교회가 상동에서 그 건너편에 있는 달성궁으로 옮겨가면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바로 이 해가 청년 전덕기에게도 경사스러운 해였다. 20세 된 총각 전덕기가 15세 된 신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신부의 이름은 창양 조씨(昌壤 曺氏) 정식(貞植) 양이었다.
그 후 1896년에 스크랜튼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 이듬해에는 상동교회의 입교인으로 등록하게 되어 전덕기와 상동교회와의 오랜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상동교회의 [나라와 교회를 빛낸 이들], p.55~57, 1988)
건양 1년(1896년)의 성탄절
건양 1년 십이월 이십오일은 구세주 예수씨*의 탄생일이라.이날은 예수 믿는 나라에서는 하나
님의 은혜를 더욱 감사히 여겨 종일 기도하고 찬양하는데, 우리 조선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십여 년 전부터 참빛 된 복음의 도가 차차 흥왕하여 가니, 경향 간 각처 교회에서도 그날을 큰 명절로 삼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찬미소리가 그치지 않더라. 더욱 고마운 일은 정동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는 여자아이들이 찬미가를 새로 지어서 부르는데 그 뜻인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셨으니 아직 믿지 아니하는 형제자매들도 바삐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우리와 같이 이후 영생을 예비함을 바란다’ 하여 그 말이 온유하고 그 뜻이 화평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화할 듯하니 우리 조선에 여학교가 없었는데, 이 여자 아이들은 이 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아 이런 일을 능히 하니 이 일을 보면 조선 여자 아이들도 잘 가르치면 남자와 못하지 아니 하겠다 하더라.
평양교회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옥에 들어가서 갇힌 죄인에게 회개하는 도를 전하고 전도 책 한 권씩을 주었는데 평양 관찰사가 전도하기를 허락하여 옥문을 열어주었더라.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1권 1호 1897. 2. 2.)
*편저자주: 초기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호칭을 ‘님’자 대신에 성씨에 붙이는 ‘씨’자를 붙여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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