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민중의 빛과 소금으로
무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
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죄를 모폐치 못
할 뿐더러 길이 지옥에 빠져 고초를 받으리라.
세상에 빛이 비추이되 고약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빛
을 미워하여 빛으로 가지 아니하니 이는 그 하는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함이요 참 이치를 좇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서 제 하는 일이 하늘로부터 나온 것을 나타내고
자 함이라
- 노병선의 [파혹진선론] 중에서 -
1월 1일 협성회 회보 간행
1월 16일 남감리회 서울 구역회 조직
4월 9일 협성회 회보를 매일신문으로 발행
6월 18일 제임스 홀 부인(Dr. Mrs. James Hall), 평양
여성치료소 개원
10월 2일 배화학당 개교
11월 만민공동회 구성
* 남궁 억, 황성신문 사장 취임
엡윗청년회 이야기(2)
우리 엡윗청년회를 대한국에 시작하기는 지난 1897년 5월 연환회에서 창립을 결정하고 벌써 8개월이나 지났다. 그때 연환회 회장 도이스(Joyce) 감독께서 인천 도원시 목사를 대한 엡윗청년회 중앙회장으로 택정하시고 평양의 노블 목사와 정동 이화학당에 있는 페인부인을 중앙회 위원으로 택정하시어 대한에 엡윗청년회를 창설케 하시니라.
이 8개월 동안에 한 일은 세 가지니 첫째는, 장정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둘째는 회의 마크를 제작하여 나누어 주고, 셋째는 청년회를 다섯 곳에서 조직하였으니 인천과 서울 세 곳과 평양이니라.
우리 엡윗청년회 풍속은 우리 감리교회에서 유명한 이의 성명을 따라 각 지파의 회의 이름을 짓는 법이 있으니 대한 청년회 지파들은 대한에 다녀가신 감독의 성을 따라 회의 이름을 지었는데 인천 엡윗청년회는 나인듸회(회장 김기범)로, 서울 정동 엡윗청년회는 둘이니 하나는 배재학당에 다니는 청년회로 와린회(회장 노병선)로 하고, 하나는 이화학당에 다니는 자매들로 회의 이름은 도이스회(회장 페인)로 하였으며, 달성교회는 말날뉴회(회장 이은승)로, 평양교회는 굿셀회(회장 김창식)로 하였더라.
다섯 곳의 회원은 수효는 얼마인지 자세히 모르나 대략 150여명 정도이니 만일 우리가 동심합력하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리오.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898. 1. 26.)
고씨부인의 별세
강화 홍해 교회의 고씨 부인은 금년 연세가 칠십 일이요, 믿은 지 이년 동안에 주의 은혜를 많이 받았더라. 이전에는 귀가 어두워 말을 분명히 듣지 못하더니 주를 믿은 후로 귀가 열리고 복음을 재미있게 들으며 항상 구주의 십자가를 자랑하더라.
본교회 예배당을 짓는데 진심으로 힘을 다해 보조도 많이 하고 믿는 행적을 많이 나타내고 남의 신심을 도와주며 진심으로 주를 경애하더니 금월(1898년 1월) 구일에 우연히 득병하여 십일일 오후 여섯시에 별세하니 자녀 자손들이 조금도 슬픔이 없고 살아 계실 때 좋아하시던 찬송으로 천당가는 영혼을 위로하더라.
그리고 본교우들이 일일이 상복을 입었는데 구주의 구속하신 십자가로 형제됨을 표시하려고 십자건을 쓰고 부인들은 무명 저고리에 십자가를 수놓아 입었더라.
십사일에 장례를 지내는데 본처 교우와 교항동 교우와 고비 교우들이 다 모이고 인천 목사 도원시(Rev. Jones)씨가 가서 장례를 행하려 하였더니 본교회 소관사가 있어 못 가고 본처 전도인 김기범씨와 담방리(인천 만수동)교회 속장 전 주사 복정채씨로 대신하여 교회장으로 선산에 안장하고 묘전에 십자가를 세웠으니 생시에도 주의 십자가를 자랑하시더니 사후에 육체까지라도 모든 분묘 중에 기독도됨을 표시하였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898. 1. 26.)
달성(상동)교회 한 부인의 덕행
어떤 부인 한 분은 과부로 계신 부인이요, 우리 교회에 진실히 믿는 부인이라. 각처로 날마다 다니며 힘써 전도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울면서 권하니 참 이 부인은 눈물로 싸우다가 웃음으로 거둘 것이라.
자기 돈으로 옷 없는 사람에게 옷 입히기와 밥 없는 사람에게 밥 주기와 부모 없는 아이를 구제하기와 집 없는 소경에게 움집 지어주기를 힘쓰니 이 부인은 우리 주 심판하실 때에 개벽 전부터 예비하였던 나라를 우편 면양과 같이 받을 것이 틀림없을 듯하다.
또 남모르게 은밀히 다니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니 참 이 부인은 재물을 천국에 쌓는 재미를 이 세상에 쌓기보다 더 기뻐하고 하나님께 칭찬받기를 사람에게 칭찬받기보다 더 기뻐하는 부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부인일러라.
이 부인의 전도로 들어온 교우가 남녀 합하여 사오십 명이나 되오니 이런 일을 한 사람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할 직분이오며 모든 사람이 다 이같이 하면 예수께서 각 사람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공로가 헛된 데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니 어찌 영화롭지 아니하리오.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행하기를 바라노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7호 1898. 2. 16.)
노병선에 대한 이야기(2)
교우 노병선씨가 [파혹진선론]이라 하는 책을 지어 출판하였는데, 그 내용의 대략은 서양 선교사들이 당초에 어찌하여 대한에 나아온 일과 나아와서 대한 사람을 어떻게 가르친 것과 병든 사람들을 어떻게 구제하였는가 하는 일과 전파하는 교회의 근본 뜻이 무엇이며, 사람이 세상에 나서 당연히 할 일이 무엇인지, 천주교회와 예수교회가 어떻게 다른 것을 대강 말씀하였는데, 이치가 정연하고 말씀이 분명하여 능히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을 파하고 착한 데 나아가게 하였더라. 책도 크지 않거니와 값도 아주 헐하오니 누구든지 이 책을 보기 원하거든 정동 배재학당이나 종로 대동서시에 가서 사 보시기를 바라노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5호 1898. 2. 23.)
노병선(盧炳善)은 1881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수학의 뜻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90년대의 배재학당 명예졸업생 명단에 들어 있다. 1896년 배재 안에 조직된 협성회에서 노병선은 부회장으로 일했으며, 1897년 10월에 조직된 정동 엡윗청년회 원른분회에서는 회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중앙회 서기로 엡윗의 기틀을 닦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쓴 [파혹진선론]은 한국 개신교 역사상 한국인이 저술한 첫 기독교 변증론이라는 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유동식, [정동제일교회 역사], p.146~147)
노병선의 파혹진선론(대한 광무원년 정유, 1897)
무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죄를 모폐치 못할 뿐더러 길이 지옥에 빠져 고초를 받으리라.
빛이 세상에 비추이되 고약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가지 아니하니 이는 그 하는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함이요, 참 이치를 좇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서 제 하는 일이 하늘로부터 나온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슬프다, 우리 조선 대소인민이 소문 소견이 적어 외국 사람에게 조소거리요 업수임을 받음이며, 내가 배운 것과 들은 것과 본 것만 옳다 하고, 남이 배운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은 서로 비교도 아니하여 보고 덮어놓고 그르다 하며, 어떤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남의 말만 듣고 그르다 하며, 혹 보고 들은 사람들은 리해는 교계치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몇 백 년을 행치 아닌 것이라 하고, 지금 국부 병각하며 국태 민안한 나라를 보면 근본 그 나라에서 쓰던 법과 행하던 규모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몇 백 년 지켜 내려오던 법과 규모라도 사람에게 유조(有助)치 아니하면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암만 외국 법이라도 사람에게 유조하면 기어이 모본하여 쓰니 이것이 어찌 나라가 부하고 백성이 평안할 장본이 아니뇨.
대저 나라의 잘 되고 못 되기와 사람을 화하고 못하기는 그 나라 종교에 달려 있거늘 우리나라는 종교가 있는데 행하는 사람들이 잘못 행하며 나라이 약하여 가는지, 성쇠의 이치로 종교가 쇠하여 그러한지 산림학자가 없어 그러한지 모르거니와 오늘날 우리나라에 들어온 예수교가 사람에게 유조한지 나라에 해가 되는지 리해를 아는 대로 대강 말하여 모르는 사람에게 해학케 하노라.
전일 여러 친구들의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하는 일을 알아본즉, 일본 사람은 장사로 취리(取利)하러 왔고, 청국 사람도 또한 그러하고, 불란서 사람은 벌써 여러 십 년 전부터 천주교를 가르치러 왔거니와 미국 사람들은 또 무엇하러 와서 자기 돈을 쓰고 다니면서 예수교를 가르친다 하니 무슨 의미인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의 말은 그것이 아니라 밥알로 잉어를 낚는 단 말을 못 들었는가 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 중 일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의 말은 그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 월급을 많이 받을뿐더러 우리나라에 물산이 많고 물가가 헐하고 산천이 수려한고로 이 사람이 와 있다 하는 이도 있고, 어떤 사람들의 말은 아주 그 곡절을 모르겠노라.
왜 그 사람들이 와서 학당을 설치하고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며 무의 무가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의식을 주어 아무쪼록 잘 되게 하며, 여학당을 설립하고 빈한한 여아들을 데려다가 교육도 시키며 각색 책을 박아 헐가로 병매하며 돈 없는 사람들에게는 거저 주고, 교사들이 각처로 다니면서 보는 사람마다 착한 노릇하라고 권하는지 우렁 속 같아서 모르겠다 하는 사람도 있어 사람마다 공론이 분분하여 어쩐 일인지 몰라 나도 또한 의혹 중 몇 해를 지내었더니 지금이야 파혹할뿐더러 속속들이 알아본즉 다른 까닭은 없고 주의가 한 가지 뿐일러라.
미국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의혹한 것은 몰라서 그러한 것이라. 가련 산천토지와 인심 후박과 가항 물품의 호불호를 우리나라와 미국과 비교하면 세 살 먹은 아니에게 물어보더라도 아마 우리나라가 바늘 끝만큼이라도 못하다 대답할 것이오, 음식 거처와 생재지방으로 말하더라도 미국이 몇 배가 나을 터인데, 그러면 어찌 그 사람들이 풍한서습(風寒暑濕)을 무릅쓰고 친척을 떠나 분묘를 버리고 산수가 생소한데 몇 만리 대양을 건너 어찌하여 우리나라에 와 있으리오.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의 죄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1897년 전에 예수씨를 동양 유대국 베들레헴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탄생케 하사, 물론 누구든지 죄진 사람은 저로 인하여 되를 벗게 하시고, 또한 평생을 유대국으로 다니시며 악한 사람을 불러 회개시키시고, 필경 삼십삼 세에 도로 천국으로 돌아가시면서 그 문도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 천하만국이 다 너의 형제니 나 없는 동안에 회개하고 사죄하는 도를 만국만민에게 가서 전하라 하셨으매 그 때부터 예수씨의 가르치신 도를 한 사람에게 전하고 두 사람에게 전하여 점점 이 도를 믿는 사람이 많아 필경에 지중해를 건너 구라파를 지나서 대서양을 넘어 북아메리카로 남아메리카까지 이 도가 퍼져 예수의 말씀을 믿고 그 행적을 본받는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은 고로 믿는 사람은 원근을 물론하고 서로 몸은 각각이나 마음이 피차에 교통하여 마치 사지백체가 합하여 한 몸이 된 것 같이 한 교회가 되니, 그 중에 감독이 있고, 장로가 있고, 전도사가 있어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여 물론 어느 나라이든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죄악이 관영하여 죽을
지경이 된 나라가 있다 하면 기어이 부비를 구취하여 전도교사를 보내고 그 나라 사람을 한 형제로 여기고 천로로 인도하여 자기와 동등한 사람이 되기를 일구월심으로 원하는 고로 지금 세계각국에 개명이 잘 된 나라를 보면 그 나라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은 연고라.
하나님은 대자대비하시고 무소부지하사 우리 동방 사람들이 몇 십 년을 모든 악한 일을 행하고 마귀의 종노릇만 함을 불쌍히 여기사 미국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빼서 보내시매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경향 간에 다니면서 미련한 생령을 많이 가르쳐 귀화케 하니, 한 끝으로 반갑고 한 끝으로 애석하도다. 이 도가 근본 동양에서 태어났으니 동양 사람이 먼저 행하여 서양 사람을 가르칠 터인데 도리어 우리가 서양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니 이상하도다.모르는 사람은 말하기를 서양의 도이니 동양에서는 쓸데없다 하니 어찌 어리석지 아니리오. 대저 도의 근원은 하늘로 부터 난 것이라. 어찌 서양 하늘과 동양하늘이 다르다 하리오.
무식한 이들의 말이 사람이 무엇을 못하여서 천주학을 하리오 하며 또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별안간 말하기를 ‘천주학을 하였나’ 하니 나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애석히 여기노라. 천주학이라 하는 뜻을 생각하면 하늘 천, 임금 주, 배울 학 세 글자로 하나님의 학이라 하는 뜻이니 어찌 소중치 아니리오.
또 모르는 사람들은 천주교나 예수교가 한 가지라 하나 대상 부동이라. 사백 여년 전까지라도 두 교가 분간이 없더니 불행히 교를 주장하는 이태리 교화왕 제십 리오라는 임군이 행위가 불측하여 덕국 사람 루터와 영국사람 요한 낙스와 서서 사람 요한 칼빈 등이 교회왕의 하는 일을 불합히 여겨 서로 분파하였으니, 지금은 천주교라 예수교라 하나니라. 그 때에 어찌 서로 불합히 여겼으며, 어떻게 분파한 것은 서양 사기를 보면 알 터인고로 기록치 않는다.
그런즉 누구든지 예수교를 하고자 하는 이는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많도다.
사람을 죽이지 말며, 간음을 행하지 말며, 도적질 말며, 이웃을 망령되이 증거하지 말며, 이웃집에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며, 거짓말 말며, 시기하지 말며, 미륵이나 부처에게나 성황에게나 산천에 아들 낳고 명 길고 부자되기를 원하여 축수 말며, 산을 보자고 풍수 데리고 부모의 해골을 끌고 다니지 말며, 점쟁이를 들여 택일하지 말며, 관상쟁이를 들여 관상보지 말며, 소경과 무당 불러 경 읽지 말며, 남의 귀한 자식을 유인하여 외도에 빠지지 말게 하며, 후주(後酒)와 잡기를 말라. 이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바요, 예수의 금하신 바라. 사람이야 차마 이런 일을 어찌 행하리오.
우리가 종신토록 행할 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공경할 것이라. 전도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공경하여라 하면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누가 하나님을 모르나’ 하니 이것은 안 될 말인 것이 하나님을 안다고만 하는 것이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비컨대 이는 부모를 안다고만 하고 봉양치 아니하는 모양이라.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국법에도 벗어나지 아니하며, 효제충신에도 막히지 아니하며,
둘째는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아름답도다. 세상에 어떤 도가 착한 일을 행하라고 아니 가르쳤으리오마는 착한 중에 즐거움이 있도다. 속담에 악한 일을 많이 한 집에 남은 재앙이 있다 하였으며,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에 남은 경사가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이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내세에 받나니 착한 일을 행하였으면 천당으로 좋은 상을 받겠고, 악한 일을 행하였으면 지옥에 내려져 독한 형벌을 받느니라. 하나님 도를 미워하는 이들의 말이 예수 도를 아니하여도 나만 착한 일하면 천당에 간다 하나 그것은 못 될 말인 것이 우리는 죄악이 많아 하나님을 멀리 떠난지라. 가령 신하가 임군에게 역적이 되어 다른 나라에 가서 암만 착한 노릇을 하도라도 그 본국에서는 역적이라 할 터이니, 역적소리를 면하려면 어찌하겠느뇨. 불가불 임군에게 돌아와 사유함을 받은 후에만 면할지라. 이와 같이 우리도 또한 돌아와야 할 터이라.
그러면 예수 도를 모르는 이전 성현네가 다 지옥에 빠졌겠느뇨. 하나 이전 사람들도 착한 일만 하였으면 응당 천당으로 간 줄로 우리가 믿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 “법을 정하기 전에 범하는 자는 죄가 헐하려니와 정한 후에 범하는 자는 용서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이전 사람도 착한 일만 행하였으면 예수씨의 공로로 천당에 갔을 줄 믿겠고, 세상에 무도한 사람들의 말이 천당과 지옥이 없고 사람이 죽으면 혼비백산하여 그만이라 하니 삼가할지어다.
이 말이여, 만일 천당과 지옥이 없다 하고 이 새상에서 허랑방탕히 함부로 넘어가다가 사후에 천당과 지옥이 과연 있어 그 영혼이 천당으로 못 가고 지옥으로 갈 지경이면 그 형벌이 더욱 심하리니, 동포 형제들은 빨리 예수교에 나아와 도에 근본을 궁구하여 육신과 영혼을 구하기에 만시지탄이 없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주장하여 보는 책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오.
(유동식, [정동제일교회의 역사], p.147~151)
조선의 삭개오 백사겸에 대한 이야기(2)
고양 땅에 감리교회가 들어온 지 일년이 못 되어서 읍내에 사는 장님 하나가 회개하고 입교하였는데, 어떤 날 그전부터 마귀를 신봉하던 단골이라고 다니던 사람이 한 날은 쌀과 돈을 가지고 와서 점을 쳐 달라고 하더라.
이제 새 사람이 된 그 장님이 하는 말이,
“전에는 내가 이치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혹세무민하는 한 생을 살아왔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줄을 분명히 알았은즉, 내가 비로소 밝은 빛에 나아와 하늘 아버님을 찾은지라. 천하만국에 있는 사람이 다 동포요 형제거늘 어찌 전과 같이 허망한 말로 속여 재물을 취하리오. 소위 점치려고 하는 돈과 쌀을 도로 가지고 가서 병든 형제나 자매를 구완하시오”
하니 점하러 왔던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미친 말하지 말고 어서 점이나 봐 달라”
하거늘 장님이 이르기를,
“답답한 형제여, 보시오. 장님이란 것은 제 발 뿌리에 큰 변란이 일어나도 모르는 바인데 무엇을 이리 물으시오”
하니 점보려던 사람이 말하되,
“사람이 병들어 죽겠는데 미친 말 그만두고 쌀고 돈이 적으면 더 가져올 것이니 어서 병든 사람을 살려 달라”
한즉, 장님이 말하기를,
“쌀과 돈을 버려 하나님의 재앙을 받지 말고 나와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를 믿자”
한즉, 그 사람이 성내고 가며 하는 말이,
“장님들이 다 모른다 하니 병든 사람은 속절없이 죽고 말겠다”
하고 가니 이 같은 허무한 술책에 속아서 도대체 예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 많이 하기를 바라옵나이다.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16호 1898. 4. 20.)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16)
독립협회에 대하여
칠월 십구일 밤에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씨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아뢴 말씀의 대강을 기재하노라.
황제폐하께서 물으시되 “협회 일을 어찌함이 적당하겠느냐?” 하신즉 윤치호씨가 품달하되,
“독립협회는 본래 폐하께서 백성의 지식을 넓히고자 하시어 보조금을 내려 설립하셨고, 황태자 전하께서 현판을 써서 내려 주셨으니, 만일 협회가 근본 목적을 잊어버리고 폐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칙령으로 폐하실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여 그 일이 애군, 애국하는 마음이 가상하다 하여 파하시지 아니하시고, 정부를 명하사 매사를 성상께서 백성 사랑하시는 본의를 어기지 말게 하시면 협회 회원들이 다시는 호소하는 일이 없을 터이오며, 위로는 조정이 행하는 정사를 인민들이 믿지 못하며, 아래로는 인민의 사정이 정부에 도달하지 못하여 상하가 멀어 뜻이 단절되었으므로 피차에 신뢰하지 못하고 오늘같이 반대하는 지경에 이르렀사오니 신이 절통히 여기는 바이오며, 이즈음 정세는 천하 각국의 교제가 빈번하오니 정부는 이 시국의 형편을 따라 백성을 인도하고 법률을 시행하여야 관민이 서로 편하겠나이다” 한지라.
그런즉 황제 페하께서 옳게 여기시고 하교하시되,
“협회의 말이 없더라도 정부 일이 잘 되어야 할지라 잘 타일러 더욱 잘 하라” 하시고,
“아무쪼록 협회 회원들이 조용하게 주선하여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타국으로 하여금 엿보는 마음이 없게 하라” 하옵셨다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30호 1898. 7. 27.)
김창식에 대한 이야기(3)
연환회 보고
저는 작년 연환회 이후로 특별히 외처에 다니며 전도하는데 평양 경내에 다섯 곳이요, 강서 경내에 아홉 곳이요, 용강 경내에 여덟 곳이요, 삼화 경내에 다섯 곳이요, 함종 경내에 여섯 곳이요, 증산 경내에 두 곳이요, 상원 경내에 네 곳이니 합하여 삼십 구처요, 멀기는 일백오십 리에 지나지 못하였으니 강서와 용강과 삼화와 함종 네 고을은 일곱 번을 다니고 증상과 상원에는 세 번 다녔으며, 본처 회당에서 전도하는 일은 노블 목사가 주장하여 보시고 나는 예배 육일마다 성내외에 다니며 교우 중 병인을 찾아보았으며, 주일 아침 회보공부를 가르칠 때에 교우의 수효를 기록하여 보니 가르치는 선생이 형제 중에 오명이요, 자매 중에 육명이요, 공부하는 이가 일백 삼십 명 가량이오며, 또 강 건너 봉룡동 회당에 주일마다 오후 한시면 목사와 함께 가서 전도하였는데 그 회당에 모인 교우는 삼십오명 가량이오며, 또 일 년 동안에 주일마다 거둔 돈이 엽전으로 구백 십구량 삼전이요, 그간에 쓴 돈을 회계하여 보니 예배당 세 칸과 학당 여섯 칸 세운 것과 예배당의 경비를 합하여 팔백 구십 육량이옵나이다.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36호 1898. 9. 7.)
이은승에 대한 이야기(1)
달성회당에 대한 연환회 보고
저는 장로사 시란돈씨의 지시대로 작년 유월에 과천, 수원, 용인 등의 아홉 동네에 다니며 전도하였고, 팔월에 과천, 수원, 용인, 양지, 앙성, 안성, 죽산 등 십 구처에 가서 전도하였는데 날 수는 두 달 반가량이었으며, 구월에 엡윗청년회 회장이 되었는데 회원은 사십 여명이오나 항상 참여하는 사람은 이십 명 안팎이오며, 또 십 일월부터 삼십 이 주일 동안은 주일 오후마다 아이들을 공부시키는데 아이들 숫자는 삼십 이명이오나 항상 참여하는 아이들은 이십 명 안팎이오며 그 중에 몇 명의 아이는 성경문답과 세례문답과 미이미교회 문답과 창세기 일 이 삼장과 마태복음 오장과 십이 지파와 십이 제자와 신구약 권수 이름을 능숙히 외우고 이 아이들이 성심으로 연보하는 것이 육십여 량이오니 이 모든 일을 통해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보내옵나이다.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898. 9. 7.)
정동교회 송기용의 연환회 보고
저는 작년 연환회 이후로 정동 새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기 전까지는 주일마다 오후에 성경공부하는 것을 아는 대로 형제에게 가르쳤으며, 작년 개학한 이후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한문 학생에게 가르쳐 다 외우게 하고 날마다 오후 두시부터 세시까지 학생들에게 미이미교회 문답을 가르쳐 능숙히 여러 장을 외우는 이가 더러 있사오며, 교우 몇 사람이 한문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고로 여가가 있는 대로 가르쳐 주었으며, 교우 중 경조사를 당하여 목사와 같이 가서 교회 예식대로 실시하였으며, 주일을 당하매 회당에서 설교하는 일은 목사의 시키는 대로 혹 아침에도 하고 혹 오후에도 하였사오며, 학생들을 권하여 등록도 몇이 하였사오나 이 모든 일은 다 성신의 도우심으로 하였삽나이다.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36호 1898. 9. 7.)
김기범에 대한 이야기
제물포 김기범의 연환회 보고
저는 작년 연환회에서 본처 전도인 표지를 받은 후 목사 도원시씨의 교훈을 받아 전도하였는데 우각동 교회*와 용동교회에서 주일마다 목사와 번차례로 설교하였으되 십오 개월 동안에 오십 주일은 본처에서 설교하고 병 있는 교우를 찾아가서 기도하였으며, 별세한 교우 장례에 목사를 대신하여 가서 교중 예대로 두 번을 행하였으며, 외처에 다니며 전도하기는 동으로 이십 리 되는 담방리 촌에 다섯 번 가서 전하였으며, 서편으로는 이십 리 되는 영종 섬에 두 번 가서 전하였으며, 동북방향으로는 사십 리 되는 부평, 김포 등지에 네 번 가서 전하였으며, 북으로 일백 사십 리 되는 강화 등지에 다섯 번 가서 전하였는데 외처에 전도하러 십육 차 내왕에 전도 말을 들은 사람은 육백 육십 삼인이오니 하나님의 은혜를 참 감사하옵나이다.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898. 9. 7.)
* 편저자주: 우각동교회 – 현재 인천 창영교회
최병헌에 대한 이야기(2)
정동회당에 대한 연환회 보고
저는 작년 오월 팔일에 감독 도이스씨에게 전도사 직임을 받은 후 오월 그믐께 주사 벼슬을 사직하고 성신의 도우심으로 교중 일을 보았는데 아펜젤러 목사를 도와 회당에서 전도하여 교우 몇 사람을 얻었으며, 주일마다 오후 공부할 때에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되 작년 십 일월까지 하였으며, 그리스도인 회보에 논설을 게재하여 경향 간에 있는 여러 교우에게 전파하였고 병든 형제에게 문병하며 목사와 같이 가서 세례도 주었고 장례식과 결혼식에 목사와 같이 가서 강례법대로 행하였으며, 작년 시월에 교우 박환규씨와 함께 충청조 덕산 삼백 리 되는 곳에 전도하였는데 그 후에 그 곳에 사는 신형구씨 등 몇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새 회당에 들어온 후에 전도하기를 더 힘써 하여 입교인 십여 명과 학습인 수십 명을 얻었습니다. 금년 사월에 벙커 선생과 같이 일본 황빈항에 가서 성경을 출판할 활자를 새로 만들고 오월 그믐께 돌아왔사오나 일년 동안에 행한 바 일이 내 힘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898. 9. 7.)
절골의 기적
금년 여름 장마에 인천 절골이란 동리에 교우 한 집이 사는데 그 교우의 식구인즉 내외와 십여 세 된 아들이 하나 있으니 합하여 세 사람이라.
그 교우가 밤중에 무단히 잠이 깨서 밖에 나가 본즉 그 아들은 뒤를 보러 이미 나왔는데 갑자기 집이 무너지거늘 그 교우의 부자는 다행히 화를 면하였으나 그 교우의 아내는 반드시 참혹한 지경을 당한 줄 알았더니 하나님이 도우사 집이 무너진 중에 사람 하나 나갈 만한 구멍이 있는 고로 부인이 그곳으로 쫓아 나오매 전신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한지라.
동리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의 집이 밤중에 갑자기 무너졌는데 집안 식구가 하나도 상한 데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하나님을 공경하는 효험이라 하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37호 1898. 9. 14.)
엡윗청년회 이야기(3)
청년들의 간증
정동회당에서 저녁 여섯시 반에 특별히 청년회 모임이 있었는데 상하에 등불이 휘황찬란하고 남녀 교우가 좌우에 나누어 단정히 앉았는데 교우 문경호씨가 먼저 성경 몇 구절을 읽고 간단히 말씀을 전한 후에 남녀노소가 각기 일어나서 자기의 믿는 마음을 간증하더라.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입었으며, 구세주의 공로를 어떻게 믿으며, 자기의 죄과를 어떻게 회개하며, 교회의 일을 어떻게 힘쓰는 것을 각각 말하는데 조금도 거짓됨이 없고 다 진실한 마음으로 간증하니 듣는 사람들이 마음이 서로 감동되고 정신이 쾌활하여 기질이 참 변화한 모양 같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16호 1898. 4. 20.)
제물포 엡윗청년회 학문국장 김기범씨는 이번 연환회 시 원산 전도인으로 임명된 고로 그 식구를 거느리고 그곳으로 가려고 이번에 제물포에서 화륜선을 타고 원산으로 가서 이사할 것을 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지나간 주일 저녁에 정동회당에서 간증하기를,
“내가 이번에 학익동이라 하는 곳에 교우를 찾아 들어간즉 좌우로 층암절벽에 실낱 같은 길이 있고 오십 리 되는 산골이라. 이러한 산중에 인가가 간혹 있는데 먹는 것은 감자와 산나물이라. 그곳 사람들에게 ‘세상 사는 낙이 무엇이오?’ 물으니 ‘우리는 근본 평양 사람인데 금수강산과 좋은 옷과 좋은 먹거리를 버리고 이곳에 와서 수십 년을 고생하는 것은 다만 [정감록]에 이곳이 피난처라 한 말을 믿고 난리도 아니 나는 것을 부질없이 많은 해를 보내었으니 이제는 영혼 피난할 곳이나 찾아야 되겠소’ 하고, ‘구세주를 믿는 사람이 있으니 우리도 이와 같이 육신의 괴로움을 잊어버리고 영혼 피난할 길을 부지런히 가자’ 하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41호 1898. 10. 12.)
노병선에 대한 이야기(3)
평안도를 돌아보고
1898년 7월 하순, 내가 서관(황해도와 평안도)으로 가려고 제물포에 며칠 동안을 머물면서 방방곡곡을 구경하니 사년 전에 비하면 외국인 거주지에는 집들도 번성하고 상가도 더 번창하여 서로 변화된 것이 많아 사람의 눈길을 번화케 하나, 본국인 거주지에 들어가 본즉 달팽이 집에 문전이 누추하여 거리거리 인분이요, 골목골목 거름이라. 보이는 것은 술집이요, 그 외에 소위 가게라고 하는 것은 무명 짜투리에 쌀되박에 푸성귀와 참빗이나 놓고 파는데 그 중에도 난장판은 싸우는 일이요 떠드는 소리뿐이라.
하도 한심하여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서 바라보니 화려한 집들은 회당이 아니면 서양인의 양옥이라. 더욱 마음이 답답하여 다시 학교로 찾아가니 이곳은 일어학당 학도들이 광무협회를 조직한 곳이라. 수 삼십 명 소년들이 모여 세상일을 토론하며 나라를 근심하고 어찌하면 우리도 학문이 넉넉하여 외국에 수치를 면하리오 하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위로가 되더라.
그리고는 재미가 있을 법한 여러 곳을 구경하리라 하여 박문회(博聞會)에 가본즉 또한 이층 다락 위에 본국인 사오십 명이 모여 항구에 무엇이 폐단인가? 하고 각기 아는 대로 말하자 하는 문제를 제시한 것을 보고 마음에 홀로 기뻐한 것은 이런 회의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장차 전진할 수 있는 가망성이 있음이라.
또 한 곳에 이르니 용동 미이미교회 회당이라. 남녀 교우들이 단정히 모였는데 서국 목사가 전도하되 무슨 일이든지 하는 체하지 말고 진실됨으로 하라. 우리 교회에 믿는 체하는 교우가 많아 걱정이라 하매 남녀 교우가 다 기쁘게 듣고 각각 돌아가더라.
팔월 일일 하오 열두시에 해룡환이라는 배를 타고 평양으로 향하니 망망한 큰 바다에서 멀리 사면을 바라보니 하늘과 바다는 접하였는데 요나가 배 타고 니느웨로 가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낸 일과 베드로가 배 타고 고기를 낚다가 풍랑을 만나 예수씨를 부르던 일과 바울이 유대에서 로마로 송사하러 가다가 풍랑을 만나 파선이 된 고로 널판을 타고 멜리데 섬으로 간 일을 생각하니 믿음이 적고 죄가 많으면 이런 대해에 무슨 고난이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염려가 되더라.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장산곶 여울을 무사히 지나고 진남포를 지나 석호정으로 만경대에 이르러 조그마한 배를 얻어 타고 대동강 상류로 올라갈세 주위도와 한여울과 양각도를 지나 외성을 바라보니 기자 때 정년법을 행하던 고적이 오히려 은은하더라.
팔월 삼일 상오에 부두에 내려 살펴본즉 강변 이층집들에 간혹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며, 강 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목선 배가 많이 있고, 그 외에는 일본인의 배와 청국 배들이 왕래하고 있더라.
대동문 안으로 들어가 본즉 거리에는 큰 가게 집이 절반이나 일본인의 점포요, 왕래하는 사람들이 번화하고 장사는 흥왕하는 모양이나 평양도 서울과 인천과 진남포와 같이 상업상 이권은 외국인에게 다 빼앗긴 듯하여 마음에 스스로 탄식하다가 교우 최치량씨 집에 묵기로 하고 그곳 모든 교우들의 안부를 물은 후에 마음에 스스로 탄식하던 말을 한즉 최치량씨의 대답이,
“그런고로 평양이나 상업의 이권을 외국인에게 빼앗기지 않이 위하여 이곳 백성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이유없이 어떤 집이든지 외국인에게는 비싼 값을 받더라도 팔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하더라.
이튿날은 또 교우 오석형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각처 회당과 시병원과 서양 친구들을 찾아가 본즉 그곳도 서울과 같이 서양인은 서촌에 배치하고 살되 서울과 같이 번화하게 살지는 못하나 터는 높고 정결한 곳을 가졌더라. 회당은 세 곳인데 둘은 장로교회 회당이요, 하나는 미이미교회 회당이라. 세 회당을 다 한 모양으로 정자같이 지었으며, 전부가 전도를 위하여 그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수만리 타국에서 와 있는데 서국 부인이 칠인이요, 교사와 의원이 팔인이라. 우리나라 동포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같이 수고하니 매우 감사할 일이더라.
이튿날 다시 연광정과 주작문과 우양관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병정 복장을 한 사람이 긴 담뱃대를 들고 가기에 옆에 사람에게 묻기를,
“저 사람이 만일 병정이면 총을 메야 할 터인데 담뱃대를 들고 가니 어찌된 일이냐?”
한즉 그 사람이 웃고 대답하기를,
“저 말 타고 가는 장관을 따라 가느라고 저렇게 바쁘다”
하며 도리어 묻기를,
“서울도 저러한 광경이 있느냐?”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서울 장관들은 병정 시켜 서류봉지는 들게 하되 아직은 담뱃대 들고 다니도록 한 장관은 없다”
하고 돌아오는 길에 성경 파는 집에 들어간즉 한글로 번역한 성경책들이 많은데 한 달에 책 매매되는 것은 평균하여 이십여 권이 된다 하며 그 주인의 말이 신약전서 전권 번역한 것을 서울서 내려오기를 가뭄에 비 기다리는 것같이 기다린다 하더라.
팔월 칠일은 주일이라 남녀 교우 칠십여 명이 예배당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서울회당과 같이 주일 공과를 공부한 후에 노블목사가 전도하고 그날에 세례받은 사람이 남녀 구인이라.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오후에 강 건너 봉룡동 회당에 가서 전도하는데 삼간 회당에 남녀 삼십여 명이 모여 찬미 기도하며 기쁜 마음이 얼굴에 가득하며 외모에 진실히 믿는 것이 나타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보내고 각기 헤어지더라.
이튿날 독립협회 평양지회에 가서 참석하여 본즉 회원 팔십여 명이 나라에 충성하고 나라 사랑하는 목적을 가지고 각기 연설하는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평온하리라 하는 문제를 가지고 피가 끓고 분격한 말로 연설하는 것이 참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함이 이 회로 인하여 보게 됨이라. 평양은 근본 인심이 강인하여 하나님의 빛이 비치기가 어려울 듯 했는데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인심이 변화하여 이만큼 유순케 되었으니 주의 은혜를 어찌 감사하지 아니하리오.
팔월 구일에 평양을 떠나 서북으로 향하여 가는데 곳곳에 오곡이 풍성하여 사람마다 풍년 든 것을 기뻐하는 빛이며, 순안 땅에 들어간즉 십 리쯤 되는 들에 소위 금광을 열었는데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리들 수천 명이 모여 곳곳에 땅을 파서 금을 얻는 것이 신기하였으나, 서울에 있을 때에 이 일로 폐단이 많다 함을 들은 고로 그곳 사람들에게 물은즉,
“우리가 애쓰고 힘써 가꾼 저 곡식밭을 값도 변변히 주지 않고 파니 우리 농군의 마음도 아프고 쓰리며, 작년 같은 흉년에 외처 사람 몇 천 명이 한 곳에 모이매 각종 물자가 다른 곳에 비하면 삼 배나 더 비싸 본처 백성들이 살 수가 없으며 모리배들 수천 명이 규모 없이 모였으니 어찌 피해가 없으리오”
하나, 금 캐는 사람에게 물은즉,
“아무 피해도 없고 다만 금이 잘 아니 나는 것이 걱정이라”
하더라.
이튿날 안주군에 들어간즉 성 분위기가 냉랭하고 가옥이 반이나 헐렸으며 경치 좋은 백성루에 속절없이 새 소리만 들리니 마음이 상하고 공연히 우울하여 한 노인에게 물은즉 대답하기를,
“이 고을이 이같이 폐읍이 된 것은 청일전쟁에 청군이 와서 이 한 곳에 모여 집을 헐어서 화목으로 쓰고, 부자의 재물과 상민의 물건을 모조리 도적질하여 간 고로 읍중에 부자가 없으며 상민이 모두 결단 나고 가옥이 없으니 자연히 냉랭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하며 일본 난리가 또 한 번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하기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어 물으니 그 노인의 대답이,
“청군은 모두 도적놈인고로 남의 육축을 강도질하여 먹고 사람은 보는 대로 위협으로 길짐 지우기와 역사를 시키되 먹이지도 않고 공전 한 푼도 주지 아니하였으나, 일본 군사가 지나는 곳은 그렇지 아니하야 사람을 부리되 비싸게 주고 도리어 우리를 보호하여 주었으며 심지어 이곳 사람이 이웃 빈 집에 가서 화목하려고 서까래를 뽑다가 일병에게 붙들려 남의 집을 헌 죄로 군법시행을 받았으며, 대저 거리에 앉아서 빌어먹는 사람은 다 살게 되었는고로 한다는 말이 난리가 날 터이면 일본 난리가 나라 한다”
하니 청•일 양국의 군사 형편을 알겠고 백성이 난리 기다리는 것은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도다.
평안도 박천군 구진이라는 곳에 이르니 그곳에서는 제조하는 물건이 탕건과 망건과 말총으로 만드는 각종 물건이라. 남녀노소 없이 이것을 만드는데, 항상 앉아서 하는 일인고로 늙은이는 허리가 구부러진 이가 많고 젊은이는 얼굴이 누렇게 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에 화색이 없으니 불쌍한 마음이 저절로 생기더라. 가산군 납천이라는 장에 이른즉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유기를 잘 제조하여 유기장사로 사업을 하는 고로 말하기를,
“납천의 처녀는 유기장사로 다 팔린다” 하니, 유기를 많이 제조하고 유기장사들이 많은 것은 가히 알겠더라.
정주군에 들어가 본즉 안주와 같이 냉랭한데 마침 날씨가 심히 더워 목이 타는 듯하여 냉면집에 들어가 얼음을 좀 달라 하니 한 노파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얼음은 우리 고을 원님도 못 잡수시거늘 행인이 어찌 얼음을 얻어 먹으리오. 여기서는 얼음 둘 줄을 모르는 고로 여름에는 얼음을 구경도 못한다”
고 하여,
“나도 그러기에 평양이나 서울이나 얼음 사먹으려 가련다”
했더라.
서관의 풍속이 다른 곳보다 이상한 것이 많은데 남녀 간에 흔히 여름에 적삼 벗는 것과 사나이는 명색 없는 탕건 쓰기와 상주가 아닌 포건 쓰는 것과 여자 아이들은 어렸을 때에 귀바퀴에 구멍을 뚫고 고리를 끼워주며, 여인들은 흔히 치마를 벗고 노상으로 다니며, 언어는 어눌하여 분명치 않고 반말이 많으며, 소년들은 의례히 관 쓰고 칠팔십 리 행리를 무난히 하며, 말총 감투는 의관으로 쓰니 남녀 간 하는 풍속이 삼남과 대단이 다르며, 인종은 십삼도 중에 제일 큰데 집이 심히 낮아 드나들기가 매우 어렵고 비록 큰 집이라도 마루 있는 집은 하나도 보지 못하겠더라.
팔월 십이일에 신무도라 하는 섬을 지나는데 그 섬은 좋은 말을 많이 길러 나라에 바치는 곳인데 굴레 없이 놓아기르는 말이 많아서 마치 양떼 모양으로 서로 해롭게 아니하며 새끼를 잘 친다 하니 그 역시 구경할 만하더라.
팔월 십삼일에 선천에 이르니 그곳에도 회당 둘이 있는데 남회당, 여회당이라. 우리나라에는 남녀유별의 풍속인 까닭으로 회당도 각각 세우는 곳이 있더라. 내 생각에 좀 섭섭한 일인 것이 남녀가 다 영혼이 한 가지요, 육신이 한 가지요, 음식이 한 가지요, 듣고 봄이 한 가지요, 앉고 행동하는 것이 한 가지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아들 아니면 딸이라. 그런즉 우리가 아내와 부모 외에는 형제가 아니면 자매라. 어찌 남녀가 조금인들 차별이 있으리오. 이것은 다만 피차에 믿지 못하는 까닭이라. 형제자매 간에 믿지 못하면 곧 한집 식구가 서로 의심하는 것이니, 이것은 남녀가 다 학문이 없는 고로 의리와 인정과 신심이 없음이라. 바라건대 우리 교우 형제들은 친밀히 교제하여 서로 의심하고 서로 믿지 못하여 같은 부모의 자손이 같은 방에 앉아 같은 학문으로 같이 의논하지 못하는 것을 분히 여겨 공부들을 힘써 하시오.
선천읍에 남녀교우가 팔십여 명이요, 철산과 옹천에도 교우가 간혹 있다고 하더라. 선천 동림에 이르니 그곳에는 토기점이 있는데 사방에서 우마를 가지고 와서 각색 토기를 사가더라. 선천서부터 의주까지 들어가면서 보니 의주로 나오는 물건은 소주와 기름뿐이요, 다른 물건은 도무지 보지 못하겠더라. 제일 한심한 것이 산에 나무가 없어 모두 벌거숭이인데 주린 사람이 옷을 벗고 큰 길가에 앉은 모양이라. 보는 자 뉘 아니 불쌍히 여기리오.
이와 같이 산에 초목이 없어 흙과 돌이 들어나 혹 사태도 나고 개천도 되어버리는 땅이 많으니, 첫째 한심한 것이요,
어찌하여 백성이 마음이 온통 변하여 막 먹는 백성들이 된 것이 여간 초목이 남아 있는 산에는 가서 나무뿌리까지 파가며, 하는 말이 이것 두었다가 남의 좋은 일을 하라고 하여 조금도 후일에 소망이 없는 것 같으니 둘째 한심한 일이요,
오백여 리 간에 학교 있는 곳이 없어 공자왈 맹자왈 하고 청국 사기나마 공부하는 소리가 없으니 혹 학당을 모두 산골에 지었는지 길가 동네에는 내려가면서 보아도 거리에 관 쓰고 다니는 사람은 많아도 글방은 못 보겠으니 아무리 이리저리 자세히 보고 생각하여도 교육이 끊어진 듯하니 셋째 한심한 일이오.
그러한 중에도 지방관리들은 미친 듯 취한 듯하여 구습을 버리지 않고 하는 짓들이 뇌물 송사하기와 개폐문하기와 기생장사와 없는 세금 만들어 받기와 노비문서 팔아 먹는다는 풍설이 민간에 낭자하니 넷째 한심한 일이요,
오백여 리 여정에 소위 공장이라 하는 것은 짚신 삼는 것과 흙으로 질그릇 만드는 곳과 말총으로 탕건 만드는 데뿐이라. 이것들이나마 오백여 리 사이에 한 곳씩 있으니 생산품이 없어 편리함이 없고 시장이나 읍내에 몇 푼씩 못 가지고 장사하니 일본인이나 청국인이 곳곳에 다니면서 먼저 이익을 보는 모양이라 다섯째 한심한 일이오.
산에 초목이 번성치 못하고 동리에 학교가 없으니 백성이 어떻게 위생하는 방법을 알며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이 어찌 개명되기를 바라리오. 더구나 되와 말이 크고 적은 것과 저울의 무겁고 가벼운 것과 자의 길고 짧은 것이 고을 고을이 달라 이 고을 백성이 저 고을 물건을 가지고 가게 되면 마치 프랑스 사람이 독일에 간 것 같이 서로 합당치 못하니 이것은 삼천리 대한국으로 하여금 삼백육십여 국으로 나눈 것 같은지라. 나라에 법률이 이러하고야 어찌 일심되기를 바라리오. 또한 그곳 풍속에 적동전과 백동전과 적은 은전은 쓰지 아니하고 다만 일원짜리 은전은 쓰되 엽전과 가치의 차이가 있어 일원에 넉냥 칠팔전을 주기도 하고 혹 닷냥 한돈을 주기도 하니 실로 민간에 폐단이 적지 아니하니 여섯 째 한심한 일이로다. 그곳에 논밭은 밭이 삼분의 이나 되는데 전곡은 조와 귀리와 옥수수가 많고 벼는 모종할 줄을 몰라 그냥 세워 심는 고로 힘이 더 들 듯하더라.
십 사일에 의주에 이르니 의주군도 갑오 청일전쟁 이후로 가옥이 절반이나 없어져서 읍내가 냉랭하니 대저 대로변 고을은 비참한 폐읍이라. 보는 자가 뉘 한심치 아니하리오. 교우 이성하씨를 찾아 주인하고 교회 형편을 물은즉 그곳에는 교회당이 두 곳이라 하나 교우는 불과 십인이라 하며 어찌하여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지 매우 걱정이라고 하는 고로 내가 생각하니 ‘또한 이곳에 씨를 뿌린 지가 이미 십여 년인데 도무지 싹날 기미도 없으며 몇몇 싹난 것도 잡풀에 묻혀 알곡이 되지 못하고 잡풀만 무성하니 이것이 농부의 허물인가? 씨 뿌린 자의 허물인가? 씨 뿌리고, 북돋우고, 결실되는 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바나 씨 뿌리고 북돋우는 것은 다 농부의 직책이거늘 어찌 우리 전도인의 직책이 또한 이와 같지 않으리오. 내 생각에는 전도하는 사람들이 서양 사람이든지 본국 사람이든지 매양 어느 것이든지 한 번만 가서 씨 뿌리는 것도 도만 전하여 줄 뿐 아니라 아주 자라나기까지 북돋우어 주어야 할 것이라.’
의주만 하여도 소위 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더 악한 짓을 잘하여 남에게 비웃음을 사게 하니 이것은 물고기 한 마리가 온 바닷물을 흐리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오.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도 마귀를 위하여 거짓말하고 간사하고 흉한 말로 교우를 이간하여 피차에 마음이 상하게 하며 한 입으로 여러 말하여 모든 악한 일을 행하여 조소거리가 되어 우리 거룩한 도로 오려고 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자제하여 관망만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은 자기만 지옥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회심하는 마음을 막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리오. 몇몇 위선자로 하여 주의 노하심이 장차 의주 일군에 나릴 터이오니 의주 동포들은 빨리 육신과 영혼을 모두 구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으로 빨리 나아오시오.
십 칠일에 사랑하는 형제 이성하씨와 이별하고 의주를 떠날세, 교인을 이별하면서 작별하는 글을 하나 쓰는 것이 좋을 듯하여 용졸한 문장에 회포를 적으니 다음과 같다.
“구름이 강 위에 그림자로 옮겨오니
양관으로 돌아가는 손이 고향을 생각하는 때로다.”
교인들을 십리 길에서 보내고 이별하매 다시 옷깃을 잡고 뒷 기약을 묻더라. 즉시 이별하고 가을바람을 타는 듯 평양에 도착하여 경제라 하는 화륜선을 타고 제물포에 돌아와 서울에 올라오니 어언간 한 달 사흘이나 되었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25호 1898. 10. 21.)
천당 간 확신
인천 교우 강여집
인천 교우 강여집씨는 입교한 지 육년이요 나이는 사십 칠세라. 육년 전에 몸에 병이 있어 정동 시병원으로 치료하러 갔다가 하나님의 역사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병이 치료 된 것을 깨닫고 생각하되 내가 육신의 병 뿐 아니라 영혼의 병이 더욱 심하게 들었으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리라 하고 그 때부터 회개하고 주를 밤낮 생각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 어린아이가 젖을 생각하듯 주를 한시도 잊지 아니하더라.
그러다가 작년 십일월부터 우연이 병이 들어 점점 병세가 심해짐으로 외국 의사들이 병을 치료하되 조금도 낫지 아니하더니 금년 유월에 상동병원에 가서 몇 달 치료하니 다행히 조금 차도가 있어 집으로 내려왔는데 다시 병세가 심해져서 금월 십육일에 세상을 떠나되 즐거운 마음 뿐이라. 삼일 전 하는 말이,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으니 목욕을 시켜달라”
하여 목욕하고 새 옷을 내어 입고 요에 누워 하는 말이,
“회당에 다시 한 번 못 가게 되었으니 섭섭하오나 천당으로 가니 마음이 매우 기쁘다”
하고, 마침 목사께서는 상경하시어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하고, 십육일 하오 여덟시에 그 집안 식구가 잠깐 누웠는데,
“주여, 주여 어서 저를 데려가옵소서”
하는 기도소리를 듣고 촛불을 밝히고 자세히 보니 얼굴에 화색이 나며 기운이 쇠잔하거늘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이 말을 물어보니,
“지금 내가 주를 따라가노라”
하여 또 물어,
“분명히 주를 따라가오?”
하니 대답이,
“평생 소원이었도다”
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 보기에 천당 간 증거가 분명한지라.
교우가 다 모여 찬미하고 기도하며 교회장으로 베풀었는데 십팔일 아홉시에 예배당에 들어와 예배드리고 상여를 교우들이 메고 큰 길로 가는데 목사와 교회 유사들이 성경을 들고 앞에서 질서 있게 나가고 뒤에는 여러 교우와 학당 아이 수십 명과 부인네들도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같이 산까지 가는데 따라가는 교우와 학당 아이들의 찬미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산에 다다라 목사님이 예를 베풀고 남녀 교우 팔십 여명이 찬미하여 천당 가는 영혼을 위로하였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2권 48호 1898. 11. 3.)
김창식에 대한 이야기(3)
1898년 삼화교회 성탄절
삼화읍내 교우들은 예수 탄생일을 처음 알고 경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예수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각각 찬조금을 이 삼량씩 내어 아이들을 위하여 과일과 엿과 사탕도 준비하며, 학교에 다니는 학동을 위하여 필묵도 예비하며, 먼 촌에서 오실 교우를 위하여 음식도 약간 준비하고 또 화초 그림 그린 서양 종이에 누가복음 이장 십 사절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는 말씀을 써 모두 외우게 하고 찬미 제 십오, 십육장으로 찬미하고 누가복음 이장과 사도행전 칠장을 보고 예수 나시던 일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을 백성으로 삼아 유대나라를 세워 온 세상에 구주 되게 한 일을 대강 대강 설명한 후 각 사람에게 예물을 나누어 주니 그 날에 남녀 교우와 방청객이 합하여 일백 삼십여 명 중에 남녀 교우 사십인은 참 기쁜 마음으로 이 날을 경축하였더라.
(교우 김창식의 편지)
삼화군에는 우리 교회가 일찍이 들어가지 아니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김 형제 창식씨가 힘써 전도하여 새로 얻은 교우가 사십 명에 이르렀으니 참 감사하고 기쁜 일이로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기를 대한 십삼도에 고을마다 우리 교회가 흥왕하기를 간절히 구하거니와 지금은 특별히 삼화교회를 위하여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둘째는 김 형제의 성스러운 사역을 치하하노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4호 1899.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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