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그래도 말씀은 왕성하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김참봉 어머니 집에 있으면서
날마다 성경 보고 찬미하고 기도하는 데 늘 삼십여 명
씩 모였습니다. 그 중 스물은 더 성심껏 모이고 그 성
심으로 모이던 사람들은 학습인이 된 여인이 팔인. 남
자가 오인으로 모두 열세 사람의 이름을 등록하였답니
다. 그 사람들이 공부하고자 하여 성경책을 사기로 이
십육권을 팔았습니다. 가지고 간 성경책이 부족하여 더
못 팔았습니다.
-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중에서 -
1월 1일 이승만, 체포 투옥(박영효 등의 황제폐위 음모죄)
5월 제임스 홀부인(Dr. Mrs. James Hall), 평양 어린
이병원 개원, 평양 맹아학교 시작
9월 4일 노블부인(Mrs. W.A. Noble), 평양 정의여학교 개교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3)
배재학당에서 언론인으로, 그리고 중추원 의관까지
이승만은, 1896년 정월에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강의하기 시작한 서재필에 의해서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고 민족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재필이 지도하는 협성회를 통하여 청년조직 활동과 민중계몽 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1897년 7월 9일 배재학당 명예졸업생으로 졸업생을 대표하여 영어로 졸업연설(제목: 조선의 독립)을 하였다. 그후 그는 협성회보의 논설자와 주필로 매일신문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언론활동을 계속하였다.
1898년 3월 10일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에 참여함으로 약관 24세에 정치적 기반을 갖추어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개화파인 박영효와의 관계로 인하여 그는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상황을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에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다.
중추원 의관들이 회의하는 자리에 더 필요한 인사를 정부에 천거하는 이가 십 일인인데 박영효와 서재필 양씨도 또한 그 투표한 중에 든지라. 정부에서 말하되 박영효는 역명을 벗지 못하고 타국에 망명한 자거늘 그런 역류를 천거한 것이 곧 역당이라 하고 그때에 동의한 의관 윤시병씨는 곧 파직하고 그 외 의관들은 찬반결의할 때에 가부를 다짐받는데 의관들이 참석하지 않은 이가 많이 있어서 중추원 일이 말이 못 된다 하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1호 1899. 1. 4.)
중추원 의관이 전후에 파직된 이가 최정덕씨와 윤시병씨와 신해영씨와 어용선씨와 리승만씨와 홍재기씨와 변하진씨 등 합 일곱 사람인데…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2호 1899. 1. 11.)
그리고 체포, 투옥
그리고 이승만은 마침내 1899년 1월 9일 사복 사법관에게 체포되었다.
중추원 의관 리승만씨가 일전에 별순검에게 잡히었는데 죄명도 알지 못하고 경무청에 갇혔다가 경무가 처음 심문하는 마당에 어떠한 사람 하나를 대질시키는데 당초에 피차간 생면부지라. 아무리 힐문하여도 죄목이 나타나지 아니하매 경무사의 말이 내의관은 과연 무죄한 줄을 알겠도다. 칙령으로 잡았은즉 내 임의로 할 수 없고 불가불 성상폐하께 품달한 연후에 석방하겠노라 하고 곧 고등재판소로 넘기매 감옥서로 내려 가두어 여러 날이 지내되 방면치 못한지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리승만씨 같은 이는 충의의 목적으로 나라를 위하다가 무죄히 옥중에서 고난을 받으니 참 억울하고 애석한 일이라 하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3호 1899. 1. 18.)
오봉래에 대한 이야기(2)와 평양 맹아학교
홀부인의 헌신적인 봉사
평양에 새로 지은 홀부인의 어린이 병동은 눈먼 소녀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이용되었다. 교재는 홀부인이 ‘뉴욕점자’를 조선말에 맞게 고친 것이었다. 조선에 돌아온 그 해 겨울 홀부인은 여가를 이용하여 조선어교재를 점자법으로 복사하였다.
교재는 가, 나, 다, 라와 조지 히버슨 여사가 지은 ‘조선어 기도서’, 그리고 십계명이었다. 홀부인은 카드와 비슷하게 빳빳한 조선 기름종이에 바늘로 찍어 점자를 만들었다. 1899년 평양에 이주한 홀부인은 다시 맹인인 오씨의 딸 봉래를 데리고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 이 점자교육은 진도가 느리고 지루했다. 그러나 봉래가 점자로 조선 자모음을 해득한 뒤에는 순풍에 돛단배같이 진도가 빨랐다. 일년 만에 봉래는 홀부인이 준비한 모든 교재들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봉래는 점자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말하는 것을 받아 자신이 점자교습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홀부인은 봉래에게 뜨개질까지도 가르쳤다. 봉래가 글도 배우고 행복해진 것을 본 병원의 환자들은 홀부인에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다른 맹인 소녀들도 받아달라고 펑했다. 이렇게 하여 조선에서는 첫 번째인 맹인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닥터 홀, [조선회상], p.138)
평양 여교우 김참봉 어머니 행전
예수씨 탄일 지낸 후에 홀부인과 함께 평양서 팔십 리 되는 왁매머루라는 촌에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그곳에 사는 김참봉의 어머니가 우리를 청하였소이다.
그 부인이 예수교에 들어오기는, 이전에 홀의원께서 가르쳐서 처음 회개하고 교우된 오서방(오석형)이 인도하여 예수의 빛을 받으신 부인이요, 이 부인은 진실히 예수를 믿으며 성경 말씀과 같이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촛대 위에 두어 들어오는 바로 보게 함 같이 온 동리 사람에게 예수의 빛을 드러내나이다.
그런고로 그 집을 보매 예수의 빛이 참 나타나고 또 우리가 한 집에 가 보니 그 집에는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외인의 집인 고로 사람들도 우매하고 집도 매우 더럽고 재미가 하나도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김참봉 어머니 집에 있으면서 날마다 성경 보고 찬미하고 기도하는데 늘 삼십여 명씩 모였습니다.
그중 스물은 더 성심껏 모이고 그 성심으로 모이던 사람들은 학습인이 된 여인이 팔인, 남자가 오인으로 모두 열세 사람의 이름을 등록하였답니다. 그 사람들이 공부하고자 하여 성경 책을 사기로 이십 육권을 팔았습니다. 가지고 간 성경책이 부족하여 더 못 팔았습니다.
한 번 그 집에서 예배를 하는데 여러 곳 사람을 청하여 함께 예배하고 좋은 음식을 미리 준비하였다가 먼데서 온 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대접하여 보내고 그 날에 여러 사람이 더욱 하나님 은혜를 감사하고 영광을 주께 돌렸습니다.
우리가 떠나올 때에 모든 사람이 대단히 섭섭하다고 하며 또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나이다. 예수께서 온전히 겸손하시고 어질고 사랑하시는 예수니 어느 나라 어느 곳 사람이든지 주를 믿는 사람은 행실이 예수와 같을 수 있겠습니다. 이 부인은 가세도 별로 가난하지 않고 자녀도 다 가졌사오나 영생의 천당복락을 바라시고 진실히 믿으시고 실행하오니 우리가 부귀비천을 생각지 말고 예수만 믿도록 합시다. 부자라도 이 세상 복만 의지하지 마시오. 세상 복은 없어지는 복이나 천당 복은 영원한 복이올시다. 동포 형제들은 깊이 생각하시기 바라나이다(평양 여교우 노씨 수잔의 편지)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5호 1899. 2. 1.)
강화 교우들의 행전
권신일, 권혜일, 주순일
강화 홍의교회 교우 권신일씨는 매월 초하루에 형제들과 더불어 교우 형제들을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 집안 식구들을 다 모으고 찬미하며 지나간 한 달간의 평안히 지낸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오는 달 한 달 동안을 평안히 지낼 복을 하나님께 빌고 또 성경 몇 절을 보고 그 뜻을 해석하여 그 마음을 새롭게 권면하더라.
또 권혜일씨는 복음을 가지고 각처로 전도를 다니다가 교동 송가 땅에 가서 박형주씨 집에 유숙하며, 그 동리 사람 육칠 명에게 함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며 성경도 여러 권을 사서 공부하게 하였으니 다 성신님의 감화하심을 감사하고 장차 그 땅에 교회가 일어나기를 하나님께 빌더라.
또 주순일씨는 남면 길성 땅에 가서 전도하여 십여 명과 함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복음 여섯 권을 주어 공부하게 한즉 그 사람들이 열심히 말하기를 음력 정월 초순 안으로 다시 와서 찬미도 가르쳐 주고 성경 뜻도 일러 달라 하더라.
우리는 참 교동 송가 땅과 강화 남면 길성 땅에 하나님의 독생성자 예수씨의 빛이 밝아 장차 그 두 곳에 구원할 사람이 많이 일어날 줄을 믿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노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7호 1899. 2. 15.)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4)
감옥생활
감옥 안에 있는 죄인이 여러 명인데 혹 무슨 죄명인지 알지도 못하고 갇힌 이도 있고 혹 죄명은 있으나 여러 날을 가두어 두고 한 번도 재판도 아니한 이도 있고 혹 재판하여 무죄한 줄 아나 어떤 법관의 사사 혐의로 갇히어 있는 이도 있어서 하루 콩나물 소금국과 뉘와 돌 투성이 밥 두 그릇에 주린 창자를 견디지 못하고 동지 섣달 설한풍에 냉기가 뼈를 도리고 오뉴월 장마 속에 악취가 코를 찔러 그 중에 병이 나서 죽는 이도 있고 배를 주려 병난 이도 있어 그 정세가 말이 못 되는지라.
우리나라도 차차 개명에 진보하려면 먼저 백성을 사랑할 것이요, 백성을 사랑하려면 먼저 옥정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제일 급무라고 사람의 공론이 분분하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11호 1899. 3. 5.)
하나님을 향하는 영혼
내가 품고 있던 질문은 꼭 한 가지,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 예배실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하고 즉시로 목에 씌운 형틀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나의 조국을 구해 주시옵소서.”
성경책 한 권이 몰래 들어왔다. 죄수 한 명은 간수가 오는지 보기 위해 파수를 섰고 또 한 명은 책장을 넘겨 주었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7개월(1899년 2월~8월) 동안 나는 형틀을 쓰고 있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중에서)
엡윗청년회 이야기(4)
평양 엡윗청년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씨의 은혜를 입사와 무궁한 복을 누리기를 원하오며, 우리 청년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사와 새로운 각오로 1월 10일에 각 임원을 새로 선정하였는데 회장 오석형, 전도국장 박승필, 인제국장 임정수, 학문국장 김락선, 다정국장 오석찬, 통신국장 강인걸, 회계국장 김제선 등이라 하였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899. 3. 1.)
정동 엡윗청년회
그동안 교회의 사무가 바쁘고 또한 구애되는 일이 있어 우리 회가 여러 달을 모이지를 못하고 좋은 세월을 헛되이 보냄은 우리 청년회에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 어찌 개탄하지 아니하리오.
정동교회를 담임하는 아펜젤러 목사가 우리 청년회의 허송세월함을 애석히 여기사 예배당 옆에 방을 예비하고 우리 청년들로 하여금 그 방에 모여서 기도회를 열라고 하시니 조금 이후로는 우리가 매주일 오후 6시 반에 기도회로 모이고 간혹 일월 일차씩은 토론회로 개최할 터이니 모든 회원들은 일제히 참여하여 우리의 지식을 넓히고 우리 목사님의 권면하시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노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899. 3. 15.)
제물포 엡윗청년회
제물포 청년회에서 임원들의 임기가 지난고로 새로운 임원들을 택정하였다고 하는데 회장은 안정수, 전도국장 장원근, 인제국장 강덕표, 학문국장 하춘택, 다정국장 강원선, 통신국장 이연수, 회계국장 김영기 등 제 씨요, 회원은 35명이라. 우리가 바라기는 이 새로운 임원들이 직분을 열심히 감당하여 새로운 사업을 많이 하시오. 우리 청년회의 임원들 직분은 곧 한 정부와 같아서 새로 조직된 정부가 좋은 사업을 많이 하여 그 백성을 더욱 진보케 하여야 떳떳한 일이지만 만일 그 백성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사욕을 채우려고 백성의 기름을 빼든지, 선왕의 강토를 외국인에게 주자하든지 벼슬을 탐내어 명성이나 얻자고 하여 그 정부를 더럽히면 이는 나라에 곧 역적이라 어찌 나라가 온전하리오. 이것은 세상 상관되는 일이라 오히려 말할 것이 없거니와 우리의 할 직분은 천국에 관계되는 일이라 더욱 삼가할지어다(중앙회 서기 노병선)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899. 3. 29.)
구춘경에 대한 이야기
성장, 의병활동, 세례
구춘경은 고종 1년(1864년) 서울 사대부 가문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한학에 능통하였다. 그의 관명은 연영(然英)이나 자(字)인 춘경(春景)으로 통상 불리어졌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있었으나 당시의 불안한 정치상황에 그냥 있을 수 없어 사퇴하였다고 한다. 18세 때에 전의 변씨 미례(세례명)와 결혼하여 슬하에 장자 정서(禎書)를 비롯하여 모두 4남을 두었다. 그는 성품이 관대하여 관직에서 사퇴한 뒤 선생으로 존경받으며 세상사를 관망하고 지냈다.
그러던 중 고종 32년(1895년) 을미 10월 8일에 국모인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 계기로 1896년 1월과 2월에 걸쳐 일본에 대한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때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곳은 광주, 여주, 이천지방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중심무대가 된 곳이 바로 이천이었다. 이천의 의병활동은 서울에 있던 청년지사 김하락, 구춘경, 조성학, 김재원, 신용희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896년 11월 16일, 이들 동지들은 한강을 건너 17일 이천군에 들러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令長)의 포군 백 명을 징발하였다. 여러 대로 나누어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구춘경은 양근과 지평에서 군사 300명을 모군하였다. 이어 각처에서 의병 수천 명이 이천으로 모여 들자 이천 수창의소(守倡義所)를 설치하고 구춘경은 중군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896년 1월 18일, 일본군 수비대가 이천 의병들을 쳐오자 구춘경은 광주 넓고개에서 이들을 맞아 승리하였으며, 패주하는 일본군을 광주 장정 장터(노곡리)까지 추격하여 많은 무기와 군량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이천으로 개선하였다.
같은 해 2월 11일에 일본군은 다시 이천을 향해 남하하면서 이현을 점령하고는 한 동네를 고스란히 불태우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의병들은 남한산성을 근거로 많은 의병 전사자들을 내면서 6월 초순까지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전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에서 패한 후 구춘경은 의병 30명을 이끌고 이천에 회군하여 해산하였다. 그후 그는 애국단체인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대부분 기독교로 입문한 것을 보고 애국단체 지도자들과 관계하면서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구춘경은 이 때만해도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기독교를 이용한 구국운동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깊은 갈등에 빠져 고민하다가 마침내 1897년 2월 서울 상동교회로 찾아가서 스크랜튼을 만났다. 그는 거기에서 기독교인이 될 것을 결단하고 기독교인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그 해 그는 경기도 이천 노곡으로 이사하여 자기 집에서 3일간 집회를 가졌고, 또 예배를 드렸다. 그는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후 1899년 3월에 덕들(덕평)교회에서 이천 일대 교인들의 처음 세례가 거행되자 그도 같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 군병이 된 것이다.
(김동옥, [이천지방 감리교회사], p.95~97)
최병헌에 대한 이야기(3)
삼대가 입교함
정동 교우 최병헌씨는 구세주를 독실히 믿고, 성신의 능력으로 열심히 전도할 뿐 아니라, 먼저 자기의 식구를 권면하여 그 부인과 자녀가 다 신실한 교인이 되었다.
그 부친이 충청도 보은 땅에 사는데 작년에 올라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 자식에게 들은즉 참 거룩한 도라. 내려가서 교회 문답을 공부하고 집안에 있는 우상을 다 없이한 후에 연락하마”
하시더니 일전에 그 자제와 손자를 보내어 말씀하되,
“나는 늙어 행보하기가 어려운고로 자손들을 대신 보내니 교회에 등록하여 달라”
하기에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그 부자와 손자의 이름을 다 학습인에 등록하였으니 최씨의 삼대가 다 구주의 자녀가 된지라.
우리 교회가 대한에 나아온 지 불과 십여 년에 이런 일이 있으니 이 영광을 어찌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리오.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9호 1899. 3. 1.)
이 형제 용섭씨의 마지막 행전
원산교우 이용섭씨는 평안도 숙천 사람으로 갑오년 난리에 피난으로 원산까지 내려오더니 성신의 도우심으로 영생하는 피난처를 얻었는지라. 예수씨를 믿은 지 사년이요 나이는 오십 세라.
그는 목수 일을 하는데 항상 하는 말이,
“예수씨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건만 목수 일을 해 보셨다 하셨으니 우리들이야 이런 일하기를 어찌 기쁘게 하지 아니하랴”
하며 구부러지고 험한 나무라도 먹줄을 치고 자귀로 깎고 대패질하면 좋지 아니한 나무가 없으니, 우리 죄인들도 예수씨의 피로 씻으면 정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이 비유로 전도하며 마을에서도 도를 열심히 준행하니 촛대 위에 둔 등불 같은지라.
전 주일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고 돌아가며 형제들에게 하는 말이,
“내가 이 세상에 십년만 더 있었으면 남에게 할 일을 다 하겠는데 떠날 때가 가까웠노라”
하더니, 이튿날 갑자기 병석에 누워 육일 만에 이월 십이일 오후 십이시에 별세하였는지라.
교우들이 모여 천당 가는 영혼을 찬미가로 위로하고 교회장으로 할세, 그 동리에 상여가 있으나 세상 형식의 상여를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 하여 나무로 팔인교를 만들어 그 위에 관을 놓고 백지로 단장한 후에 교우들이 서로 메고 산소에 이르러 장례를 행할세, 본 교회를 치리하는 목사가 없어서 본토 전도인 김기범씨가 와서 목사의 대리로 장례를 행하고 안장하였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9호 1899. 3. 1.)
달성(상동)회당 손형제 완식씨 오대 입교
손완식씨 댁에서는 오대가 입교하여 지난번부터 예배당에 함께 다니고, 손호석씨 댁에서는 사대가 입교하여 지난번에 예배당에 함께 참여하니 참 치하하고 흠모할 일이라.
다른 성 가진 이도 많건마는 하필 손씨 집안에서만 사오대 입교한 이가 있는고, 혹 어떤 사람 말은,
“성이 손가인고로 손이 이같이 많다”
하나 그렇지 아니한 것이 손씨도 혹 자손이 없는 자도 있은즉 그것은 다 헛된 말이요, 우리 생각에는 손씨의 집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고르게 가진 고로 천복을 더욱 많이 받아 그러한 줄 아오니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오며, 또 간절히 바라기는 사오대 함께 다니시는 이 손씨들이 이 세상에서도 천복을 받아 이같이 경사로이 다니시니 후세에 천당에서도 함께 영화받기를 원하노라.
이 세상에서는 비록 함께 행하나 혹 천당 영원한 자리에 만일 함께 영광을 받지 못하면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이 달성회당에 삼대 다니시는 교우는 여러분 되시니 다 기록하지 못하고 차차 또 기록하여 보내리라(달성회당 이은승)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12호 1899. 3. 22.)
옥중에서 전도함
배동명에 대한 이야기(1)
옛날에 구세주의 도를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쇠사슬을 치고 옥중에 갇혔으며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 찬미하고 기도했었는데, 지금 황해도 연안읍에 사는 배동명씨는 무슨 잘못된 일이 있어 사오년 전부터 해주 감옥에 갇혀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구세주께서 믿는 자의 죄과를 사유하신다는 말을 듣고 성경을 구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더니 성신의 감화하심을 얻어 몸이 비록 옥중에 있으나 기쁜 마음으로 징역 사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되 우리가 이전부터 죄악이 많은 고로 옥중에서 고생하거니와 우리 죄를 참으로 용서하시고 우리 영혼을 구하여 주실 이는 예수밖에 없다 하니, 모든 징역 사는 사람들이 죄를 통회하고 열심히 믿는 자가 십 육인이라.
쇠사슬을 치고 징역살이를 하는 중이라도 일제히 찬미가로 노래하니 훈훈한 분위기가 가득한지라. 순검에게 간구하여 전도인이 감옥소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 말아 달라 하고 전도 선생에게 편지하되 성경책을 많이 가지고 와서 전도하여 주시면서 책값과 전도인의 여비까지라도 우리들이 모두 담당하여 드리겠다 하더라.
우리는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보내고 감사하오며 배동명씨는 일이 비록 교회를 위하여 고초를 받음은 아니로되 옥중에서 찬미하고 기도함은 옛날 사람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다 하노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19호 1899. 5. 10.)
희한한 일(조선의 첫 합동결혼식)
민찬호, 문경호
양력 칠월 십사일 정오에 정동 새 회당에서 배재학당 학도 민찬호 문경호 양씨가 이화학당 여학도와 혼인예식을 가졌는데, 목사 아펜젤러씨가 교회의 예법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랑 신부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단단한 약조로 맹세함을 여러 사람이 다 증인으로 참여한지라.
이 혼인에 대하여 희한한 것은 대한 풍속에 아들을 쌍둥이로 길렀으면 혹 한 날 한 시에 혼인함이 있거니와 타성으로 나이도 같이 아니한 사람들이 어찌 한 자리에서 한 시에 혼례를 행할 수 있으리오.
대한 개국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요, 서양에도 또한 드문 일이라. 대한 풍속에는 매파가 있어 총각과 처녀가 당초에 그 심지와 덕행과 재주를 서로 알지 못하고 백년해로할 큰 일을 경솔히 작정하거늘 이제 이 형제 자매는 한 교회의 학도로 피차에 심지와 재주를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혼인하되 교회 예법대로 행하였으니 대한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믿는 사람끼리 혼인하도록 하면 대한에도 어리석은 풍속이 차차 그칠 줄 아노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29호 1899. 7. 19.)
제물포교회에서 온 편지
배동명에 대한 이야기(2)
형제 이명숙, 하춘택 양씨를 황해도 등지에 전도하러 보내었는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해주부 감옥소를 지나는데 찬미소리가 은은히 들리기에 차차 가까이 가 보니 감옥에서 나는지라. 즉시 경무청 총순 오씨를 찾아보고 감옥소 문을 열어 달라 하여 들어가 본즉, 징역 사는 배동명은 연안구 동문 밖 사람인데 예수씨를 믿는 형제라.
무슨 죄가 있어 해주에서 징역을 사는데 감옥소에서 마음을 평안히 하여 성경을 힘써 보고 기쁜 마음으로 찬미 기도하는데, 징역 사는 사람들이 예수씨 말씀을 듣고 각각 자기 죄를 깨달아 알고 슬픈 마음으로 회개하고 열일곱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여 주일을 지키고 날마다 찬미하고 기도하더라.
처음에는 순검과 옥사가 못하게 하더니 나날이 계속하매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금하지 아니하며 주일에는 징역도 시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게 하며 도리어 옳게 여겨 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더라. 이씨, 하씨 형제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니 징역 사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더욱 열심히 되어 재미있게 들었으니, 사람이면 어느 누가 능히 감옥소에서 중노동을 하며 괴롬 받는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겠느뇨? 성신 감화하시는 은혜를 감사하노라 하였더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30호 1899. 7. 26.)
연안에서 번성하는 교회
우리 미이미(감리)교회에서 연안 등지에 전도한 지가 불과 삼년 정도 되었는데 하나님께 참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 것은 형제와 자매들이 열심히 재물을 하나님 나라에 쌓아두고 이름을 생명록에 기록하고자 하여 다투어 돈을 연보하여 다섯 곳에 예배당을 설립하였으니 연보하신 교우의 성명을 다음에 게재하노라.
강성로씨가 일천 육백량이요, 그의 매씨 강소사가 삼천 팔백량이요, 오해두씨가 일천 이백오십량이요, 강성원씨가 삼백량이요, 이중호씨가 이백량이요, 고정필, 안병선, 변여문, 유경수, 이동혁 제씨는 각각 일백 량씩 연보하였고, 강봉규, 이재성, 김치호, 강봉인 제씨는 오십량씩 내었으니 돈이 합해서 칠천 팔백 량이라.
이 돈은 다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에서 나아온 재물인즉 우리는 이 소문을 들을 때에 연안에 있는 형제를 대하여 대단히 감사하오며, 우리 교회가 더욱 부흥하기를 기도하노라.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39호 1899. 9. 27.)
평양 여교우 노씨 수잔의 행전
양력 십일월 십오일에 홀의원의 부인과 함께 평안도 운산 고을에 가서 전도할세, 여러 사람을 만나 하나님의 아름다운 복음을 가르치고자 하나 불쌍하고 답답한 백성이 하도 많아 눈물이 자연히 흐르더라. 우리 대한 형제들은 어찌하여 회개하지 못하여 구세주 밝은 빛을 본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고? 어서 속히 깨달아 믿는 형제 되기를 바라오.
대한국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내신 사람이요, 하나님이 주신 만물로 먹고 입고 살건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므로 각인에게 손해가 적지 않소, 물론 아무 곳이든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형제 외에는 모두 어리석고 가련한 백성이라.
우리가 이곳까지 오며 본즉, 대한국이 비록 적으나 지역마다 풍속이 다른지라 청국이 가까운고로 사람의 말소리도 이상하고 예법도 다른 것이 많으니 시집 가는 신부는 보교에 담아서 말에 태우고, 근친 가는 새아씨는 녹의홍상으로 말에 태우고, 계집아이들은 삼세부터 은으로 귀고리를 문고리같이 만들어 달고 다니게 하되 이십 칠 팔세 되면 빼어버릴 때에 대단히 섭섭한 마음이 있다 하오.
평양 여인들은 머리에 큰 타래를 틀어 얹고 수건을 쓰는 법이오. 북도 풍속은 청국여인과 같이 머리털로 귀까지 싸서 빗고 수건도 쓰지 않는 법이오. 젊은 여인이 낮에 밖으로 다니지 못함은 서울 풍속과 같도다.
우리가 성신의 인도하심으로 형제 오씨 집에 이르러 보니, 그 형제는 주를 믿음으로 다른 사람보다 모양이 대단히 다르더라. 우리가 오씨 집에 있을 동안에 여러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모일세, 남자들이 먼저 모여 기도하고 간 후에 여인들이 또 모여 찬미 기도하였는데, 그 중에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이 남자가 둘이요, 여인이 둘이요, 아이가 하나이라.
북진(北鎭) 지례벌비라는 곳으로 가 미국사람이 만든 금광을 구경하는데 기묘한 기계는 다 알 수가 없고, 아주 깊이 파서 몇 백 길 되는 땅속으로 들어가는데 어두워서 그저는 들어갈 수가 없어 촛불을 들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금이 많이 난다 하오. 미국사람이 금을 보이는데 우리 눈에는 검은 흙이 반 사발 쯤 되는데 미국 사람의 말이 금전으로 사백 원어치라 하니 참 귀중한 보화라.
우리가 여러 가지 구경을 한 후에 기쁜 마음도 있고 한심한 마음도 있으니 우리나라 백성들도 이목구비가 남의 나라 사람과 같거늘 어찌하여 외국 인민들은 대한까지 와서 금과 은과 모든 보화를 한량없이 실어가되 대한 사람은 타국에 있는 보화를 가져오기는 고사하고 내 나라 땅에 있는 금은도 파낼 줄 모르고 분한 마음도 없고 그곳에 가서 모꾼 품이나 팔고 은전 몇 원씩 받는 것을 대단한 횡재로 알더라.
또한 근처에 사는 백성들은 술을 만들어 금광 일꾼들에게 팔기에 정신이 없으니 차마 불쌍하고 애석하여 볼 수 없도다. 밤낮으로 바라옵기는 우리 정부에서도 백성을 참으로 사랑하고 갖가지 재주를 가르치며 나라가 부강하기를 힘써 사람마다 산업을 편하게 하면 자연히 분명한 지경에 이를지니 어찌 외국사람만 못하다고 근심하리오.
대한이 부강할 방법을 말할진대,
첫째는 인자하신 구세주를 믿어야 할 터이요,
둘째는 쓸 데 없는 신당에 비는 것을 폐지하고, 그 돈으로 학교를 더 많이 시작하여 각국의 학문을 가르치며, 백성들은 각기 자기의 자제들을 힘써 학교로 보내어 갖가지 재주를 배우게 하면 후손들이라도 마침내 부강한 세계를 볼 터이니 대한 형제들은 어서 빨리 깨달을지어다.
우리가 또 평양에 있는 석탄광을 구경한즉 좋은 석탄이 많은데 대한 사람들은 땅 속에 묻힌 재물을 찾을 줄 모르다가 타국사람에게 내어주니 실로 애석한 일이라.
우리 같은 작은 여자의 마음도 이같이 상하는데 대한 형제들은 어서 속히 깨달으시기를 천만 번 바라오며, 악은 선의 원수라. 예수 믿는 형제들이 금광에 간즉 믿지 아니하는 자를 비방할 뿐 아니라, 미국사람의 악한 행실을 보고 더욱 유혹에 빠지오니 참 절통한 일이라.
형제 오씨가 처자를 데리고 운산에서 전도하고 있으니 여러분 교우들은 그 형제를 위하여 많이 기도하시고 추수하시는 주님께 간구하여 일꾼을 더 많이 보내어 추수하게 하옵소서.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3권 52호 1899. 12. 27.)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5)
아펜젤러에게 보낸 옥중서신
아펜젤러는 1899년 12월 28일 일기에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 이승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약 11개월 전에 서울에서 스크랜튼 의사와 함께 걷고 있다가 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만민공동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권력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였는데, 사복형사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의 체포는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풀려 나올 바로 그 무렵에 탈옥하라는 설득을 받았으나, 도망하는데 실패하여 다시 감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성탄절에 나는 침구를 약간 보냈는데, 아래와 같은 답장이 왔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서양력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인 것은 확실하지만 어느 날이 성탄절인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이 편지를 귀한 선물 대신 새해 인사까지 겸해서 성탄절 선물로 여기시고 받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행복, 강녕, 축복, 만사형통이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저희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서 값비싼 담요와 쌀, 그리고 땔감을 보내 주신 데 대해서 무슨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저와 같이 비참하고 죄많은 몸을, 감옥에 갇혀 있는 가망없는 상태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더욱이 의지할 데 없는 제 가족들에게 먹고 살아갈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제 부친께서 편지로 선생님의 크신 도우심에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우리 집이 아주 곤경에 처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황량한 겨울이기 때문에 어둡고 축축한 감방인 이곳은 요즈음 너무나 춥습니다. 대부분의 수형자들은 의복과 음식, 그리고 모든 것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선생님의 자비로 저는 지금 옷이 충분하며, 그래서 추위가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차후에 다시 글월 올릴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그치겠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학생 이 승 만
(아펜젤러의 일기 중에서, 1899.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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