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93년 평양에 파종하다

솔석자 2016. 6. 5. 18:20

1893

평양에 파종하다

 

 

189311월 닥터 홀은 아름다운 잔디의 도시로 불

리는 평양으로 갔다. 얼마 후 선교기지용으로 구입한

기생학교(권번)로 입주하였다. 그는 조선 말을 계속 공

부하기 위해 조선어 선생으로 온 노병선씨와 함께 입주

했다. 그러나 평양시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은 아

                                      직 사라지지 않았음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 아펜젤러의 연례보고서 중에서 -

 

 

 

                            311일 윤치호, 미국에서 조선을 위한 선교헌금 기탁

                            4월   1일 닥터 홀, 평양에서 선교센터 구입

                            831~98일 조선 현지 본처전도사를 위한 신학

                                                   반(조선 선교연회 4년 과정) 개설

 

 

 

  9차 연회에서 선택된 조선의 사역자들(1893. 9. 5.)



 

정동 지방

제물포 지방

권사 재임용

노병일, 한용경

 

권사 신규 임명

유치겸, 김창식

최병헌, 정인덕

주재 전도사

 

강재형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10)

 

조선을 위한 선교헌금을 기탁하다

 

  1893년 봄 윤치호는 밴더빌트 대학 신학부에서 3, 에모리 대학에서 2, 도합 5년에 걸쳐 신학을 공부하고, 또한 각 분야에 걸친 새로운 학문들을 두루 섭렵한 미국 유학생활을 마쳤다.

  상해로 떠나려고 준비를 하면서 에모리 대학 총장 캔들러(W.A. Candler)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내가 모은 돈 200불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오.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그 돈을 마음대로 처리하여도 좋습니다.”

 

   조선은 아직도 청국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던 윤치호는 귀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해에 머물면서 모교인 중서서원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1)], p.131)



 

김점동에 대한 이야기(3)

 

  조선 관습에 의하면 여자애들은 열네 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해야 한다. 처녀들은 머리를 길게 땋아서 등으로 늘어뜨리기 때문에 미혼자와 기혼자가 쉽게 구별된다. 지금 열여섯 살이나 된 에스더(김점동의 세례명)가 시료소에서 일하고 있으니 사람들 입에 크게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에스더의 집에서는 이러한 수치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신랑감을 구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무당이나 병신 혹은 병에 걸린 사람들만이 미혼으로 남는다. 그래서 에스더 집안에서는 비기독교인에게라도 시집을 보내려 했다. 이런 형편일 때 박유산이 신랑 후보로 뽑혔던 것이다.

  박유산은 닥터 홀에게 전도되어 기독교 신자가 된 청년이다. 홀 부인은 결혼하기 싫어하는 에스더를 크게 동정해서 처음에는 이 결혼을 추진하지 않으려 했으나 자신도 결혼해서 행복하다는 점을 느끼고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박유산과 에스더는 1893524일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893429일 토요일, 미세스 홀의 일기에 기록된 더 자세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우리는 닥터 홀이 데리고 있는 사람 중에서 에스더에게 적당한 신랑감을 발견했다. 24세 된 청년인데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태도가 부드럽고 좋다. 스크랜튼 여사는 에스더를 시집보내려고 서두르고 있다. 에스더는 지금 16세로 키도 크다. 남자의 이름은 박유산, 에스더의 어머니는 신랑감이 떠돌이 노동자였던 때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랑감의 선친이 훈장을 했었는데 5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맏아들로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자 겨우 승낙했다.

  에스더는 결혼문제에 대해 참으로 훌륭한 편지를 내게 보냈다. 에스더는 자기보다 지체가 낮은 사람과 결혼하라는 말에 기분이 상해서 우리를 원망해도 그녀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실제로 여학교에 있는 학생들은 거의 다 자기 집안보다 나은 집안으로 시집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스런 소녀는 결혼을 이러한 방법으로 생각지 않았다. 다음은 그녀의 편지 중 일부이다.

 

  “나의 소중한 자매여, 당신이 어제 보낸 편지를 받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는 여지껏 말하지 않았던 제 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3일 동안 저는 뜬눈으로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느질도 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습은 누구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 점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남자를 싫어해도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박씨를 저의 남편으로 삼고자 하시면 저의 어머니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줄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참 묘한 느낌이 듭니다.”

 

  사랑하는 에스더, 그녀는 날이면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 나는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

 

(닥터 홀,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p.99, 1984)

 

 

 

노병선에 대한 이야기(1)와 홀에 대한 거룩한 회상

 

  189311월 닥터 홀은 아름다운 잔디의 도시로 불리는 평양으로 갔다. 얼마 후 선교기지용으로 구입한 기생학교(권번)로 입주하였다. 그는 조선말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조선어 선생으로 온 노병선씨와 함께 입주했다. 그러나 평양시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입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약 20여 명의 이웃 사람들이 노병선에게 몰려와서 말했다.

  우리 평양의 풍속으로는 평양에 있는 모든 집들은 그들의 사정에 알맞게 매년 평양의 신에게 공양하는 법이오. 당신은 서울에서 왔고 저 양반은 서양에서 왔으니 우리 신에게 많은 돈을 공양할 수 있을 것이며 내내 복을 받을 거요.”

  그들은 이 말을 통역하여 닥터 홀에게 설명하라고 했지만 그러나 노병선은 거절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에게는 돈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화가 나서 노병선에게 말했다.

  당신은 돈을 공양하지 않아도 되오. 당신은 우리가 말한 내용을 저 서양에서 온 양반에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그는 할 수 없이 닥터 홀에게 그들의 말을 통역했다. 닥터 홀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당신들의 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돈을 내지 않겠소. 우리는 진정한 신, 우리와 당신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도 이 하나님을 믿기를 바랍니다.”

  성인 하락전(聖人賀樂傳, 하락은 닥터 홀의 조선 이름)은 그 후에 일어난 사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들은 대단히 화가 났다. 모두들 밖으로 나갔으나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몰려왔다. 그들은 나(노병선)와 예수를 믿는 한 소년을 끌어내어 그 소년의 옷을 찢고 때렸다. 나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면서 그들은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너를 때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신이 주는 벌이다.’

  그들이 다 때리고 놓아주자 나는 닥터 홀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했다. 닥터 홀은 분이 나서 참기 어려워하는 나를 진정시키느라 성 바울이 어떻게 매를 맞았는지 읽어보지 않았는가고 되물었다.

  ‘성 바울이 어찌했건 내가 알 바가 뭐요. 계속 예수를 믿는다고 당신을 따라다니다가는 내 몸뚱이는 성치 못할 것이오. 내가 죽은 뒤에 아무리 좋은 데 간다 한들 살아서 이런 고통을 당하니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반박했다. 그리고 나는 곧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팔을 들어 부드럽게 나를 감싸며,

  ‘우리 기도합시다. 형제여

하고는 함께 무릎을 꿇고 나더러 먼저 기도하라고 권했다.

  아직 분이 가라앉지 않았으므로 나는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닥터 홀이 먼저 나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계속 사랑과 인내로 나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잠시 후 함께 매를 맞았던 소년이 돌아왔다. 그는 소년의 다친 다리를 치료해 주고 찢어진 옷값을 치러 주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하다가 곤욕을 당한 것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모든 일이 지난 뒤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이 일이 있은 뒤에도 많은 사람들은 마치 꿀통에 모여드는 벌떼처럼 닥터 홀에게 계속 몰려왔다. 그러나 아직도 밤이 되면 가끔 돌멩이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우리들은 강물 위에 뜬 얼음 조각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닥터 홀은 항상 어린이들의 친구였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많은 어린이들이 따라다녔다. 그는 어린이들을 사랑했다. 어린이들이 그의 수염을 자주 잡아당기곤 했으나 그는 웃으며 다독거려줄 뿐이었다.

  하루는 어째서 애들이 당신을 그처럼 괴롭히는데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마음이 찬가?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애들과 같은 마음과 착함을 지니라고 했소. 그런 마음이 바로 천국이라고 했소.’

  나는 그가 애들처럼 착함을 알았다.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착한 성인 하락, 그 사람은 천국 갈 사람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닥터 홀,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p.104~105,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