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89년 조선 사방에서 복음은 가을보리처럼 자라고

솔석자 2016. 6. 2. 23:39


1889

조선 사방에서 복음은

가을보리처럼 자라고

 

 

복음의 정신은 널러 퍼져갔다. 책과 문서들이 널리 보

급되었고, 집에서 집으로, 손에서 손으로 사업이 이어

졌다. 몇 사람이 유교와 불교를 배척하고 죄에서 구원

해 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다. 가르침을 받기 위

해서 개인적으로 찾아왔던 자들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자기 집에서 어느 정도 정기적인 집회를 가지고 있는

, 몇몇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이 그곳으로 찾아들고

                                       있다.

- 아펜젤러의 연례보고서 중에서 -

 

 

 

                                    2월            아펜젤러, 충청도 공주지역 전도여행

                                    212일    스크랜튼 대부인, 여성교회 시작

                                    8월            신실한 의사 맥길(W.B. McGill), 입국

                                                    보구여관 여의사 하워드, 과로로 출국

                                    8월            아펜젤러, 경상도 대구와 부산지역 전도여행

                                  12월  7일     정동교회 구역회 조직

                                                    종로와 제물포 예배처소 개척 시작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9)

 

   미국 밴더빌트 대학 신학부에서 유학하고 있던 윤치호는 조선의 구원에 대해 18891214일 일기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내 일생은 나의 이 의무들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결정될 것이다. 내 사명이란 곧 나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교육을 실시하는 일이다.”

 



최병헌에 대한 이야기(1)

 

   최병헌은 1858년 충북 제천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남달리 총명한 머리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며 학문을 닦았다. 20여 세에는 한학에 통달하여 경세에 뜻을 두고 과거시험장에 참석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발견한 것은 권력의 배경으로 과거의 급락이 좌우되고 있는 사회의 부정 부패상이었다. 그뿐 아니라, 관권을 등에 업고 민중을 수탈하는 부패한 사회를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나라가 망하는 것은 단순히 외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내부적인 부패가 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 사회와 민족을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1880년 그는 중국 서적을 통해 서양문명의 발달상과 그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후 조선에 첫 선교사로 들어와 사역하고 있던 아펜젤러 목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1888년 어느 날 정동에 있는 양관으로 아펜젤러를 방문하였다. 거기에서 아펜젤러로부터 한문성경을 한 권 선물로 받아 읽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와의 첫 만남이었고, 또한 아펜젤러와의 사귐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 해 그는 배재학당의 한문선생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8881125일 주재 전도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주재 전도사로서 사역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성서번역사업에도 동참하게 되었다.

  아펜젤러의 1889년 연례보고서에 소개된 최병헌의 전도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른 한 명의 주재 전도사는 우리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는데, 지난 여름방학에는 남부지방을 여행했다. 그의 보고서는 활기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말씀을 기쁘게 듣는 사람들을 만났고,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 학생인 다른 두 사람이 여름방학 동안에 상당한 여행을 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

(유동식, [정동제일교회의 역사], 참조)




 

   여자들만 모인 교회

 

  212일 저녁에 *장로사 아펜젤러 목사의 사회로 여러 달 동안 교육받아 온 한 부인 집에 모여서 속회를 시작했다. 이번 주일 저녁에는 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 중 세 명은 이화의 식구로서 한 사람은 선생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상급반 학생이었다. 며칠 후 8명의 명단을 받았는데, 그들이 신자가 되기에 합당하게 생각되어 원입인 명부에 올렸다. 이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교회를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 번 연례 선교사회의에서 올링거 목사를 담임자로 임명했다.

  올링거 목사가 담당했다지만 아직 우리 말을 구사할 수없으므로 실제로는 스크랜튼 대부인과 때로는 조선 현지 전도사가 집회를 인도했다. 당시 서울에 있던 유일한 조선사람 전도사는 유치겸이었다. 아직 남녀, 내외가 엄한 때라 유 전도사는 회중과 그 사이에 휘장을 쳐놓고 그 뒤에서 예배를 인도해야만 했다.

 

* 편저자주: 장로사 정회원 목사

 

(Annual Report of the Wome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9-1890, p.52 “Women’s Work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1896, p.6)

 

 

조선의 스데반 노병일 권사

 

  선교사들이 들어온 관문, 항구 도시 제물포에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1889년 아펜젤러가 두 채의 작은 집을 구입하고 권서인 노병일을 파송하면서부터였다. 선교 개척 책임자로 올링거 목사가 파송되었다.

  노병일은 충청남도 서산군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 예수를 믿고 권사가 되어 제물포로 거처를 옮기면서 서점을 열고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필묵행상으로 변장하여 글방이나 객주집을 전전하면서 먹이나 붓을 파는 것을 핑계로 하여 전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전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미친 놈으로 취급받아 업신여김을 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전도하니 모든 사람이 다 귀찮게 여겨 관가에 고발해서 노씨의 전도 중지와 그의 축출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인천 감리 성기운이 노병일에게 퇴거 명령까지 내리게 되었으나 전도는 나의 본분인고로 전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니 인천 감리는 인천에 있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병일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필묵행상을 하며 전도를 계속했다.

  하루는 마침 시내에서 20리 되는 뱀내장터(현재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의 장날인지라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하다가 전도금령을 위반했다고 하여 병졸들에게 구타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소생했는데 이렇게 생명을 내걸고 전도한 그는 마치 돌무더기에 파묻혀 순교한 거룩한 스데반과도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로 병을 얻어 그는 2년여 만에 서울 상동시병원으로 왔다. 거기에서 다시 전도를 계속하며 자신의 신병치료도 받았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89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제물포 전도자 노병일은 복음 전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이렇게 죽기까지 충성하였다.

 

(감리회보, 38, p.3 ARMEC, p.24, 1895, [내리교회 100년사], p.111~112)




 

 

두 명의 본처 전도인

 

  1125일 임명한 두 사람의 주재전도사를 올해 연회에서 다시 임명하여 허가를 갱신했다. 그 중 한 사람 장점화는 서울에서 185마일(297Km) 떨어진 평안도에서 중요한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평양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소수의 회중이 모이는 정기 집회를 가지고 있으며, 기회 있는 대로 이웃 마을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팔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우리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는 유치겸으로서, 지난 여름방학에는 남부지방을 여행했다. 그의 보고는 활기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말씀을 기쁘게 듣는 사람들을 만났고,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 학생인 다른 두 사람이 여름방학 동안에 상당한 거리의 여행을 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

(아펜젤러의 1889년 연례보고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