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복음의 가을보리를 심다
하나님, 내가 사는 모든 환경 밑에서
모든 시간에, 그리고 어느 곳에서도
이것이나 또는 다른 어떤 숭고한 결심도 참을성 있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소서.
- 윤치호 일기 중에서 -
1월 주일학교 조직
2월 6일 조정에서 노예세습제 폐지 공포
5월 31일 이화학당 시작
9월 23일 신 교육기관 육영공원 시작
10월 9일 정동교회 시작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6)
세상적인 것에서 성결함으로
아침에 일어나니 어젯밤에 취하여 구토한 것이 보인다. 아마 찬 술이 더운 술보다 더 발작시키는 힘이 있는 까닭이리라.
- 너의 마음에 한 약속을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에 대한 죄인이 될 것이다.
일곱시 반경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낮잠 자다. 양심이 편안하지 못한 것을 깨닫다.
- 너는 많은 술을 마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대단히 큰 쾌락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너의 체력이 여위어 갈 때 날카로운 가책이 조용히 너를 매질할 것이다. 그렇다면 외양상 쾌락의 유익이 무엇인가. 영혼을 잃어버린 자에게 있어 무엇이 전체의 세계인 것인가.
‘오 하나님, 이 시간부터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결코 내가 어젯밤에 한 것과 같은 가련한 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나를 용서하시고 내 영혼의 영양이 되는 음식으로 성경을 사랑하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오 이제 하나님, 용서하여 주소서.’
오후 2시 반에 충일회에 가 예배를 마치다.
(윤치호의 일기, 1886년 4월 4일 일요일)
책 보다. 어제처럼 바람 크게 불고 때때로 비 뿌리다.
- 내 자신이 숭고하고 고결하고 현명하게 거동하며, 손상될 나의 건강을 보호하며 낭비로부터 나의 금전을 방지하며, 내 자신이 보다 유용하고 신앙심 깊은 지식에 공헌하기를 바라서, 나는 적어도 내가 상해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국적을 가진 ‘밤을 파는’ 여자들과도 불의한 성교를 갖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하나님, 내가 사는 모든 환경 밑에서, 모든 시간에, 그리고 어느 곳에서도 이것이나 또는 다른 어떠한 숭고한 결심도 참을성 있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 주소서.’ 라고 기도하며 마음에 약속한다. 밤새도록 바람 멎지 않다.
(윤치호의 일기, 1886년 8월 14일)
배재학당의 발전
아펜젤러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세 학생들에게 매일 한 시간씩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점차 늘어났다. 선교부는 6월 8일 학교를 시작해서 7월 2일 첫 학기를 끝냈다. 이 무렵의 사정을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는 언제나 대단합니다. 이 새로운 언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디딤돌이 되는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영어를 공부하려고 합니까?’ 라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벼슬을 얻으려고’ 라고 대답합니다. 일종의 전초전으로 우리 선교부는 6월 8일에 학교를 시작해서 7월 2일에 첫학기를 끝냈는데, 이 동안에 등록한 학생은 6명입니다.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은 이 나라의 상투적 핑계인 ‘시골에 볼 일이 있어서’ 나가 버렸고, 또 한 명은 가족 중에 초상이 나서 등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는 1886년 9월 1일 단 한 명이 등교한 가운데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빈 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일부 채워졌습니다. 10월 6일 현재, 20명 재적에 18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거의 매일 입학신청을 내는 학생들로 끊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연말까지는 학교가 붐빌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만열, ‘아펜젤러), p.475)
이화학당의 시작
아펜젤러와 함께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튼 대부인은 1885년 10월에 선교부지를 정동에 마련했다. 곧 남선교부 부지 언덕 위에 있는 초가집 열아홉 채와 옆에 붙은 빈 터를 사들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 해 2월부터 이곳에 ‘여학당과 사택’을 짓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리노이주에 사는 블랙스톤 여사의 보조금으로 1886년에 완성되었다. 그때의 사정을 스크랜튼 대부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의 학교 사업은 새로 지은 학교로 옮겨오기 여섯 달 전에 스크랜튼 박사 집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학생이 한 사람 뿐이었다. 그 학생은 어떤 관리의 첩이었는데, 그의 남편은 그가 영어를 배워가지고 훗날 왕비의 통역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여자는 약 석 달 동안만 우리와 같이 지냈다.
첫 학생으로 입학한 생도는 1886년 6월에 왔다. 그 아이는 한 10여세 되는 아이로 집안 살림이 몹시 구차하여 우리에게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몇 달 못 되어 그의 어머니는 자기 딸을 외국인에게 맡기는 것보다 가난을 참고 견디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웃 사람들이 그 어머니를 나무랐던 것이다. 조금 있다가 미국으로 끌려가서 그 신세가 어찌될는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었다. 몇 달이 지나서야 그를 완전히 안심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들어온 생도는 ‘조별단’이라는 조그만 어린 거지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스크랜튼 박사가 성문 밖에서 발견하여 병원으로 데려다가 치료해 주던 환자였다.”
스크랜튼 대부인의 교육목적은 조선의 부녀자들이 보다 좋은 사람이 되며, 조선이 그리스도 안에서 훌륭한 조선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M. F. Scranton, Women’s Work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Vol.3, No.1, 1896, p.339)
정동병원을 통한 치료의 역사
“우리의 의료사업은 스크랜튼 의사가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6월 15일까지는 의료시설이 매우 빈약했고, 진료는 스크랜튼 의사의 집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곳에서 522명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9월 10일까지 320명이 우리 진료소의 치료를 받아 12개월 동안 모두 842명의 환자를 치료한 셈이 됩니다... 우리가 의료사업을 한 주 대상은 바로 가장 불쌍한 계급이었으며 심지어 때로는 버림받은 자들도 치료해 주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치료 기간 동안 전적으로 우리가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만일 병이 심해서 그가 일할 수 없을 경우에 그랬습니다. 잘 사는 계급의 많은 사람들도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자기 집에서 왕진을 받기도 했습니다. 곧이어 치료비를 조절해야 할 문제가 생겨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부담을 더 많이 지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치료비를 덜 내게 되었고, 자주 무료로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경우에 있어서 치료 결과가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환자가 나았는지 죽었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업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충분한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치료 후 오랜 기일이 지나서 다른 새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자주 그들이 다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만성병을 가진 환자들이 연일 그치지 않았는데, 의약품이 시시각각 새롭게 개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병이 가벼운 것인지 혹은 급성인지는 치료할 수 있는 확률로 판단합니다. 우리의 사업은 거의 의약 부분에만 한정되어 왔습니다. 외과 수술은 환자를 위하여 선뜻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대수술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우리 약들을 매우 잘 복용하고 있는데, 종종 한 번에 너무 많이 사용합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는 집에서 쫓겨나서 천막 속에 옮겨지거나 그냥 버림받아서 거지로 빌어먹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몇 사람만 크게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의사가 한 사람 더 충원되는 대로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려진 사람들을 담다하는 데 헌신하게 할 계획입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듣기에 즐거운 많은 선한 일이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학질은 가장 흔한 병입니다. 부주의와 영양부족에서 오는 피부병 환자가 대단히 많습니다. 매일 연주창에 걸려 그 증세를 보이는 환자가 찾아오고, 또한 물론 매독 환자도 자주 있습니다. 장티푸스와 디프테리아는 이상하게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천연두는 풍토병인데, 그 병으로 인한 합병증이나 후유증을 치료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시아 진성 콜레라가 올 여름에 이곳에 만연했었는데, 수천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놀랍게도 더운 날씨 중인데 갑자기 콜레라가 소멸되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9월 중순까지 나는 거의 한달 동안 콜레라 환자를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양약이 조선 사람들에게 일대 선풍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 약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한약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불확실하고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수은을 사용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나 그렇게 치료를 받다가 죽은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경우에 수은이 흡입제로 복용되었던 것입니다. 한약을 사용해서 효험을 보지 못한 환자의 경우에도 나는 계속해서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수백 명을 도와주었으나, 수천 명이 더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에서 내가 암시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의사가 오는 대로 거처도 없이 바깥에 눙 nj 있는 환자들, 친구도 소망도 없는 버림받은 자들, 무관심과 비바람에 노출된 채로 죽어가야 하는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을 돌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스크랜튼의 1886년 연례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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