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가을보리

1884년 인도하시는 손길/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4)

솔석자 2016. 5. 28. 23:52

1884

인도하시는 손길

 

                       지난 7월 다년간 동양에 있으면서 선교사업에 종사하던

                       신학박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가 조선을 방문

                       하였는데 그 목적인즉 할 수 있으면 교회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본

                       공사관의 빈객으로 있었는데 그 방문한 목적에 대하여

                       자유롭게 토의하였다. 조선정부에서는 그 사업에 대하

                        여 별로 반대함이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일본으로 귀환

                        한 후에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미감리교회가 서울에서

                      교회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일에 지장없이 하게 할 뿐

                      아니라 은연 중에 권장하시겠다고 보증하는 말씀까지

                      해 오셨다.

                             - 푸우트 공사가 188491일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 보

                           고서 중에서 -

               

                      마침내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3월     4일      가우처 박사, 닥터 맥클레이에게 조선에 대한

                                       선교조사 의뢰.

                     6월   24일      맥클레이, 선교 교섭차 조선 방문

                     7월     3일      고종황제의 선교 윤허, 윤치호의 통역으로 이루

                                       어짐

                   12월     4일      갑신정변

 

 

 

윤치호에 대한 이야기(4)

 

 

   인도하시는 손길

 

 

  일본에 주재하던 미감리회 선교관리자 맥클레이(Dr. R. S. Maclay)는 조선 현지답사를 위하여 6월 24일 선교사절로 부인을 동반하고 서울을 방문하였다. 조선에 도착한 맥클레이는 일본에서 친교를 맺은 바 있는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을 통하여 선교 외교에 성공하여 188473일 드디어 고종황제로부터 의료 및 교육사업’(전도사업은 불허)의 윤허를 받았다.

   선교 허락에 관한 이 기쁜 소식도 윤치호 선생의 통역으로 전달되었는데 좌옹 윤치호 선생의 약전에 의하면 73일 실망, 고대, 희망에 초조한 맥클레이에게 김옥균이 와서 좌옹 윤치호의 통역으로 고종께서 선교를 윤허하신 뜻을 전하자 맥클레이는 좌옹 윤치호 선생이 참으로 김옥균의 말을 바로 통역하였느냐고 재삼 물어 보고 한없는 기쁨을 나타내었다고 하였다. 맥클레이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즉시 미국 선교본부에 그 결과를 보고하여 조선 선교를 착수하도록 하였다.

 

(전략)

   새벽에 예궐하여 미국상사의 내해 운항의 허락과 미국인에게 병원 빛 학교의 설립과 전신설치를 허가해 줄 것을 아뢰었다.

(윤치호의 일기. 74일 금요일)



  몰아가시는 손길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이 사건은 역사를 깨우는 부르짖음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구원의 손길이 인간 윤치호를 통하여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국을 등져야 했던 윤치호의 회고를 실은 1930년 1월 30일자 동아일보를 통하여 들어본다.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와 민영익 등 수구당의 분쟁이 차차 심해 가더니 일천팔백팔십사년  십이월 사일 우정국 사건을 일으켜 정부를 번복하였으나 다시 수구당에 몰리어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때마침 푸우트 공사도 귀국하게 되었음으로 혼자 남아 있기가 매우 위험하였소. 뭐 수구파의 미움을 받은 것은 조금도 없지마는 그저 그때는 외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또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그 길을 택하게 되었소."(이하 생략)


  역시 하나님의 역사


  한편 미감리회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12월 4일 밤에 목사인 스크랜튼(W. B. Scranton) 박사를 선교사로 임명하였으며, 얼마 후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도 임명되었다. 여선교회 해외선교회(W.F.M.S.) 역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조선 여성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스크랜튼 박사의 어머니(Mary F. Scranton)를 선교 사역자로 또한 임명하였다. 하나님은 조선을 사랑하셨고 역사는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윤춘병, [맥클레이 박사의 생애와 사업],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