賀樂醫員(Dr.W.J.Hall)史蹟

제 육장. 한국 선교지에서의 활동(4)

솔석자 2018. 4. 23. 09:05

    허을 의원의 덕행을 참 알아보려 한즉 집안 식구에게 행하는 것으로 알 것이라.

    내지에서 자기 부인에게 한 편지를 보면 가실지락(家實之樂)이 어떠한 것을 알지라. 자기 부인께 말하되,


    "우리 집은 참 귀하오나 한 가지 애연(哀然:슬픔을 자아내는 모양)한 것은 우리의 작별함이로소이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인즉 관계치 아니하외다. 귀한 부인이여 모든 것을 인하여 걱정마시오. 내가 모든 무거운 짐을 담당코져 하오나 이 세상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우리에게 긴한 위로를 주지 못하나 주께서 능히 하실 수 있사오니 찬송드리고,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어려운 일이라도 하십시다."


    삼월 십륙일에, 내 마음에 가득한 사랑이 귀한 부인과 쉐웃에게 늘 가나이다. 이 귀한 자식이 우리 마음의 정을 얽매나이다. 내 바라는 것은 이 아해가 잘 자라서 옳은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고 세상에서도 유익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부인의 친서를 이 일에 받아보니 반갑고 즐거움이 가득하와, 긴 편지라도 자른 것(짧은 것) 같사오며 내 심장이 부인을 앙모하오며 주께 견딜 힘을 구하였나이다


    삼월 이십팔일, 귀부인을 이같이 홀로 있게 함이 내 마음에 심히 아프오나, 이 전도순행 차는 우리 량인에게는 크게 복이 되겠나이다. 내가 심중으로 사랑하는 것을 다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것을 배웠사오며, 이러한 시험이 내게 유익하오며 또한 긴하외다. 그러나 감사하올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든 가운데서 인도하여 주심으로 항상 주를 의지하여 기쁘옵나이다.


    신도신문 사장에게 한 편지

    오월 초 사일에 부인과 아해로 더불어 인천항을 떠나  화륜선으로 평양에 오는데, 인천항을 떠난지 불과 몇 시간이 못되어서 대풍을 만나 가지 못하고 삼십 삼시 동안을 닻을 주고 섰다가 주일 이튿날 보산에 득달하매 평양서 칠십 오리라. 화륜선은 더 가까이 가지 못하는 고로 한국배를 타고 하룻동안에 평양에 득달하매, 믿는 자들은 모두 강변에 나와 맞으며, 집에 이른지 오래지 못하여 구경군들이 옹위하매 우리 아내 말하기를, "삼일 날 보리라" 하였더니 여려 백여명 여인과 아해들이 문밖까지 옹위하매, 일차에 십명 씩 들여 오분 동안 구경시키더니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심히 조급하여 기다리지 못하고 앞의 무리를 밀치고 들어오매, 문이 깨어지고 집안과 마당에 사람이 가득한지라. 할 수 없이 부인이 아해를 안고 마당에 나와 앉아 구경하게 하매 일천오백여명 여인과 아해가 구경하고 사람 무리에게 견디지 못하여 관찰사께 구하여 호병 몇 명을 파송하여 보호하기를 청하였으되 보내지 아니하였는지라.

    사일 날 아침 한 시에 한국 신도 두분이 깨우며 하는 말이, "김창식씨와 집주인을 잡아 가두었다" 하나, 할 수 없어 하나님께 맡기고 개동(開東)을 기다려 본 후에 내려가니 군수께서 기침(起寢)하지 아니한고로 보지 못하고 옥으로 가보니 우리 신도뿐 아니라 장로회 마목사를 돕는 자도 가두었는지라. 그날 밤에 순검이 마목사 류하던 곳에 가서 그 도와주는 자를 잡아 참혹하게 때렸으며, 창식씨는 고랑을 채운고로 심히 곤고한 모양을 보았사오며, 집에 돌아와 부인이 무사한가 보려고 왔사오며, 본부에도 함께 가고 전보국에도 함께 가던 오서방까지 잡아갔으니, 지금은 리서방이 함께 다니는데 말하기를, "나도 잡혀가면 혼자 다니시겠나이다."

    여러 만명 백성 중에 우리 내외만 타국인이외다. 이러한 형편 가운데 부인과 아해를 늘 혼자 두고 옥과 전보국으로 돌아다녔사오며, 그 위태한 지경은 가히 짐작하실 듯하외다. 약차(若此:이 같은)한 사연을 의사 시란돈씨와 마목사께서 대영미국공사에게 아뢴 후 전보하기를, "공사께서 속히 일하겠다" 하는 기쁜 소식이 왔는지라. 선교사들이나 공사께서 합심하여 열심으로 행하고 대영국공사 가드너씨와 미국공사 씰씨께서 전보하시기를, "우리가 외부에 보고하고 갇힌 사람을 즉시 놓아주며 타국 교섭 상에 상의약대로 보호하며 달래었다" 하였으며, 또한 마목사 전보에는, "요새아(여호수아) 일장 구절이 왔는지라. 이때는 곧 사일 밤이라. 밤에 사람들이 돌팔매를 하고 담을 다 무너트리니 어느 때에 분요(紛擾:분란)한 무리가 달려들어올는지 알 수가 없사옵나이다.

    오일 아침 개동에 관속이 나아와 하는 말이, "대황제폐하께옵서 비지(批旨:상소에 대하여 임금이 내리는 비답의 말씀)를 내리사 '그는 다 불행한 놈들이니 신도들과 함께 죽이라' 하셨"기에, 옥중에 가 보니 과연 그 말대로 우리 신도들을 악형에 넣고 죽일 줄로 여기되 주를 배반치 아니하는지라.

    평양은 우물이 없는고로 강물을 길어다가 먹는데 물장수를 금하고 군축하며 관찰사는 황후의 족속인고로 권세가 있어 외부 정권을 상관치 아니하고 지금 같으면 그리스도의 도가 평양에 설립하기로 죽음과 군축까지라도 원하시면 우리는 주를 위하여 죽기로 예비하였나이다. 모든 시험을 당할지라도 견딜 힘을 많이 주었사오며 긴한 대로 더 주시겠나이다. 우리 한국 형제들이 주를 위하여 이같은 악형을 당하는 것을 볼 때에 내 마음이 아프더이다. 이십팔년(1866년 병오박해.고종3) 이후로 이러한 고초가 없었나이다. 그 때에 천주교 신도자 여러 천여명과 여러 신부가 그 믿음을 인하여 목숨을 버렸나이다.

   사일 날 외부에서 두번 전보하였으되 오일 하오 오점(五點)이 되도록 종 무소식이라. 륙점에 삼십 육시 동안을 악형을 받은 후 관찰사가 불러 때리고 놓아주기에 나아오는데, 오는 길에 돌로 맞으며 집에 이르니 창식씨는 과히 상하여 겨우 집에 이른 것을 보니 그리스도의 진실한 치명자 발 아래라도 앉기를 원하였나이다. 마목사와 멕킨셰 량분이 도우려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오일에 떠나 이일에 득달하고, 한 주일 후에는 시란돈 의사가 내려오셨다가 멕켄셰씨와 함께 상경하고, 우리는 군축한 후에도 일삭 동안을 더 류하는데, 매일 내외가 병을 보는데 매일 이삼십여명 씩 보았고, 주일에 남자 십명 여인 칠십 명이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거치는 것을 물리치사 평양에 영혼 추수하시는 길을 여시나이다. 백성은 친근하려 하지마는 관원과 그 하솔의 충동함이라, 외부의 덕으로 갇혔던 사람의 빼앗았던 돈도 보내고 행악한 자를 벌주라 하심을 얻었나이다.

    우리가 평양에 신도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되 공사께서 영을 내려 부인과 아해를 데리고 항구보호지로 오라 하기로 할 수 없이 신도들을 전능하신 보호자에게 맡기고 평양서 마지막 배를 타고 인천항에 득달하매 항구에 병선이 많이 들어왔더이다.

    칠월 이십일 개동에, 놀란 한국인들이 소동하여 깨우는지라. 각 사대문에 일병이 수직하고 대궐에서 대포를 종일토록 놓으며 이십분 동안에 일병이 대궐을 차지한지라. 그 때부터 한국인의 개명을 돕는지라. 청일병이 지금 한국에 이르러, 처음 접전은 서울서 일백오십리 아산이라 하는 곳에서 된지라. 인천 근처에서도 수전(水戰:海戰)도 하였는데 일본이 승전하였으며, 청병은 북으로 행하여 평양에 진을 친지라. 일병이 쫓아와 량국이 합전할쌔 일본이 승전하고 평양을 다 취한지라.

    전쟁이 시작된 후 시란돈 의사와 내가 병원에서 심히 사번하나이다. 여러 생명을 이곳에서 구하였사오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다 들었사옵고 여러 명은 믿겠다고 책도 많이 사는데, 그리스도의 도를 더 알고져 하는 자 많사오니 매일 뿌린 진리의 씨가 성신의 기르심으로 추수가 풍족하겠나이다.

    구월 이십륙일에 우리 신실한 김창식씨의 편지를 받으니, 모든 신도들은 잘 있고 청국은 패하였고 일본은 승전하여 평양성을 차지하였사오며, 하나님께 감사함은 우리를 보호하여 주심이라 하였으며, 소임소를 떠나지 않고 신도 몇 명을 거느리고 우리 기지를 잘 보호하고 모든 위태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있었나이다.

    창식씨는 무목사로 인하여 예수를 믿었으며 무목사 미국 가기까지 그 수하에 있었더니, 그 후는 나를 도와주는 이가 되어 참 그리스도의 용맹지재목을 자기가 나타내었는지라. 작년 봄에도 옥에 갇혀 발에 고랑을 차고 매를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를지라도 그리스도를 배반치 아니한 자라. 한국에 이러한 보배가 많이 있을 줄 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