賀樂醫員(Dr.W.J.Hall)史蹟解題(하락의원사적해제) - 이성삼 목사
국판 바른쪽매기 내려쓰기 순한글 176쪽 반양장제본 말랄류(Bishop W.F.Mallelieu) 감독 서문 끝에 쥬강생일천팔백구십칠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 때 발행된 것은 확실한데 월 일은 알 수 없다. 용산인쇄소(탁지부)에서 인쇄하였으나 발행소 저자는 없다. 목차 사진 록목도 없어 해제자가 내용을 보고 작성하였다.
본문 끝 부분에 "... 그 성중 사람들의 말이 착하다 성인 하락이여 천당에 가리로다 하기에 나도 이 의원 행한 일을 쓰고져 하여 제목을 성인 하락의 소셕이라 하노라 노병선" 한 것으로 보아 이 책의 저자는 노병선이다. 로제타 홀이 편집한 The Life of Rev. William. J. Hall에서 부분적으로발췌, 번역한 것이다.
노병선(1871-1941)은 일찌기 배제학당을 졸업하고 정동제일교회 본처전도사로 파송받았고 제임스 홀의 어학선생으로 함께 평양에 가서 사역하였다. 그는 민족주의 선각자이며 영어에 능통하였고 그의 사위가 도병욱이다. 저서는 파혹진선론이 있다.<(노종해, 민족구국의 선각자 노병선 선생의 생애) [韓國監理敎會史의 새視覺] 도서출판 풍만, 1988년 참조>. [성인하락의 사적]이 왜 賀樂醫員史蹟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락(賀樂)은 여권에 기재된 제임스 홀 박사의 한국 성이다. 賀樂은 홀(Hall)을 중국식 발음대로 표기한 것인데 한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하락]으로 되어 원명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 책은 면지에 서명된 것과 같이 1933년 6월 4일 로제타 홀이 평양 제일교회(남삼현교회)에서 양주삼 박사에게 선사한 것인데 필자가 고서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내용도 귀중하거니와 이 서책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한국 유일본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간추려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서술하였다.
허을의원 사적(史蹟) 내용
1장. 허을 의원의 선조와 어린 시절
그는 유럽 아일랜드 후손으로 할아버지 때에 조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 카나다로 이민(移民)을 하여 1860년 1월 16일 카나다 뉴 더불린(New Dublin)에서 태어나 외조부의 이름(William)과 할아버지 이름(James)을 따서 윌리암 제임스 허을(William James Hall)이라 불렀다.
한국에 온 뒤에 한자 이름을 [하락(賀樂)]이라 불러 당시 성인 하락으로 관서지방에 널리 알려졌다.
2장. 소년시절에 하나님께 바침.
어렸을 때에 부모님은 장로교회에 나아갔으나 허을은 감리교회에 홀로 나아가다가 14세 때인 1874년 10월 23일 부흥집회에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거듭나는 놀라운 채험을 하여 인생관을 바꾸어 놓았다.
어려서는 몸이 허약하여 성장하면서 자기와 같이 몸이 약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과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특히 트로블러 목사(Rev. A.D. Traubler)의 지도 밑에서 장차 큰 일꾼이 되기 위한 각별한 신앙지도를 받았다.
3장. 중학교와 대학시절.
그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에도 언제나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일과 성경읽기, 전도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사범과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교회의 예배와 찬송인도, 때로는 설교까지 맡아 크게 부흥시켰다.
그의 일기는 신앙심과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넘쳐흐르는 글이다.
그는 1887년 여름 부흥운동가 무디(D.L.Moody)가 경영하는 하기학교에서 20일간 전도자훈련을 받던 중 뉴욕국제의료협회 책임자 다우칸 박사(Dr. Dowkontt)를 만나 그의 주선으로 뉴뇩 벨리뷰의과대학(The Bellevue Medical College)를 졸업하였다(1889).
5장. 외방전도 일을 시작함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성교사가 되기 위하여는 첫째 중생을 체험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고, 둘째로 선교지의 언어의 능력을 갖추고, 셋째로 건전한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고 증언하였다.
6장. 한국 선교지에서의 활동.
그는 사랑하는 약혼자 로제타 셔우드 박사(Dr. Rosetta Sherwood)가 1890년 8월에 먼저 내한한 뒤 이듬해(1891) 12월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1892년 6월 27일 서울에서 올링거 목사(Rev. F. Ohlinger)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평양에 개척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1893년 10월 첫 아들(Sherwood)을 낳았고, 1894년 봄에 평양에서 청일전쟁을 맞아 처자를 서울에 데려다 주고 다시 단신으로 전쟁터를 가로질러 황해도를 지나 평양성에 도착했으나, 청국군과 일본군의 격전장이 되어 9월 16일 일본군이 평양성을 점령한 뒤에도 군인과 평양 시민들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다가 장티프스에 걸려 하는 수없이 달구지를 타고 진남포로 내려와 배를갈아타고 서해안을 돌아 인천을 경유하여 서울에 왔으나 병이 악화되어 1894년 11월 24일 의사인 아내가 보는 앞에서 겨우 한국선교 삼년도 채우지 못하고 3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순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여행과 국내에서의 전도이야기, 장로회 마포삼열 목사의 편지, 친지들의 서신들, 평양성에서 성인 하락(홀)의 활동 등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홀의 선교활동 모습, [허을의원 사적'에서 1890년대의 희귀한 사진(물장수, 글방, 신랑신부, 대한제국군인, 상동병원, 보구여관, 김창식 목사 등 39점)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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