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두번의 웃음
하나
아주 신앙적으로 난 사람(?)이 아니고는 보통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을 식별하기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을 섬길 자세가 된 사람이 아니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대접하며 섬기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정성껏 아까와 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대접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줄 미리 알았건 그렇지 않았던간에, 아브라함의 손 대접하는 마음은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잘 대접을 받고 휴식을 취한 후 셋 중 한 분이 축복합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다시 오겠는데, 그 때 네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로다.”
믿기지 않는 얘기, 늙어 월경도 끊기고, 더구나 영감은 구십구세나 되었는데....
장막 안에서 무심히 듣던 사라는 깜짝 놀란 것은 잠시, 웃고 말았습니다.
중국 성경에는 그 웃음을 ‘안쌰오(暗笑)’라고 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은근히 웃다. 남몰래비웃다‘ 라고 해석되어 있습니다.
능하신 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신 분,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너무 자주 우리는 잊어버리고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삽니다.
사라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이야기지요.
둘
하나님의 약속대로 어김 없이 사라는 늙고 노쇠한 영감태기,백 살이나 먹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하여 그렇게 되리라 한 기한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렇게 늙어 난 아들, 지금으로 치면 증손자나 고손자나 될 만큼 아버지와 자식간의 차이는 99살이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얼마나 대견하겠습니까? 그 나이 되도록 아기를 처음 품에 안아 보는 늙은 모친 사라의 마음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언제 비웃었는가?’싶도록, 어쩌면 뻔뻔스러울정도로 사라는 다 잊어버리고 기뻐 웃었습니다.
중국 성경에는 또 이 웃음을 ‘씨쌰오(喜笑)’라고 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덧붙여 ‘씨쌰오안카이(喜笑顔開)’라고 했는데 이것은 ‘희색이 만면하다’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고 하면서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라의 모습에서 일년 전 그 축복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몰래 비웃었던 불신의 마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이 잘못을 알고 반성한다는 것이고 또 그런 미성숙한 상태에서 온갖 시련을 만나며 그것들을 경험하는 가운데 성숙하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알면서도 실수하고 자기에게 유익하기만 원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생활 태도, 그리고 쉽게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속고 또 속아도 여전히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안쌰오(暗笑)가 아니라 씨샤오(喜笑)를 원하시는 그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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