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 교회 목사님은 자녀가 1녀 1남, 따님의 이름은 찬미, 아드님은 진명입니다.
찬미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진명이는 네 살, 이제 좀 대화가 통하는데, 무엇을 할라치면 다가와서 하는 첫 인사가 “뭐해여?”
그 모양이 사랑스러워 꼭 안아줍니다.
온 교인들이 두 아이를 많이 이뻐하고 귀여워합니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귀여워 쪽쪽 빠는(?) 그 사랑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엉뚱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말을 연결하기 시작한 아이가 신통하게도 “떡방아깐”(떡방앗간), “꼰사님”(권사님) 소리를 하더니,
이제는 그 “떡방아깐” 소리가 방아타령이 되었는가(*참고-떡방앗간의 꼰사님은 본인임),
눈만 뜨면 “엄마! 떡방아깐 갈래” “꼰사님 갈래”하고 떼를 씁니다.
아이가 워낙 붙임성이 좋은데다가, 심방이라든가 또 이러저러한 일로
목사님 내외분이 바쁘실 때 자주 데려와 함께 지냈고,
며칠 저녁 데리고 자기도 하며 형들이 이뻐해 주기에 정이 든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 귀하는 건 애들이 더 잘 안다’고 말입니다.
사모님은 말씀하십니다. “난 몰라요. 책임지셔!”
어느 날, 교회에 목사님 아버님이시고 진명이 할아버님이신 장로님께서
다니러 오셔서 며칠 유하셨습니다.
그런데 민망하게도 할아버지 앞에서 또 ‘방아타령’을 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떼쟁이 손자를 무릎에 앉히시고 말씀하십니다.
“진명아! 방앗간이 좋냐? 집이 좋냐?”
철없는 아이는 속도 모르고 대답합니다.
“방아깐!”
“그러믄, 엄마가 좋냐? 집사님이 좋냐?”
어김없이,
“집사님!”하고 대답합니다.
철없는 아이의 대답이지만 할아버지는 서운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물으십니다.
“권사님이 좋냐? 아빠가 좋냐?”
또 아이가 대답합니다.
“꼰사님.”
"허 그 녀석…"
서운하신 할아버지는 몇 번이고 물으십니다.
그래도 대답은 뻔합니다.
하지만 가까운 날에 진명이는 ‘방아깐’,‘꼰사님’이 좋던 일을 가맣게 잊고
엄마 아빠 사랑 안에 대견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철이 없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를 때는 혹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철없는 아이의 말에도 서운함을 금할 수 없으셨는데,
하물며 스스로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의 배신을
하나님은 서운함 정도가 아니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보십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보시며 탄식하십니다.
보이지 않아도 영원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보일지라도 잠시 뿐인 세상을 사랑하는 인생을 간절한 마음으로 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2~13).
'빼랍속 사금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냥 그렇게 묻어버릴꺼나(99.02.21) (0) | 2019.04.14 |
---|---|
만일 내가 나무라면...(98.02.08) (0) | 2019.04.14 |
말짱 도루목이라고들 했을지라도…(98.01.25) (0) | 2019.04.14 |
나는 지금 어디를 보는가?(98.01.18) (0) | 2019.04.14 |
구충제는 온 식구가 같이 먹어야…98.01.11) (0) | 2019.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