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매는 아파도 덧나지 않는다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마실을 갔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위로도 받고, 물론 수다도 떨겠지만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대화 도중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도 하구요.
그러는데, 아이의 움직임이 신경쓰입니다.
어른들 말 중간에 쐐기를 틀며 말꼬리 잡고 늘어지질 않나,
경대 서랍을 여닫지를 않나,
그 집 아이를 추근거려 울리지를 않나,
어찌나 민망한지요.
처음엔 점잖게 타이릅니다.
“그러지 마라. 좀 얌전히 있거라”
그러면서도 짐짓
“아유! 이 녀석이 집에서는 안 그러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아이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진 구석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인 아줌마가 누가 부르는 소리에 잠깐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틈을 타 엄마는 주먹으로 아이 얼굴에 주장질을 합니다.
“너 왜 가만 못 있니? 집에 가서 보자. 죽을 줄 알어!”
그러고는 밖에 나와
“잘 놀다 가요”하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대문을 빠져 나오더니만
손목을 잡아채고서 끌 듯 하고 집으로 달려갑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어쩌나!
죽인다고 그랬는데,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을까요?
무슨 말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요즈음 우스개 소리에
“사소한 일에 목숨 걸래?”라고 합니다.
그런 일로 엄마가 아이를 죽인다면 살아 남을 사람 하나 있겠습니까?
아이는 눈물이 쑥 빠지도록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꿀밤 두 대에다가 서너 차례 등 줄기를 손바닥으로 맞았구요.
그 뿐입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그것은 좋지 못한 버릇이다”라는 훈계가 덧붙여졌을 뿐입니다.
말대로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도 그 엄마를 변덕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낮에 야단 친 그 아들이 안쓰러워 자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한 번 안아 줄 것입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그 사랑으로 인하여 바르게 자랄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변덕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인간 지은 것을 후회한다.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하시고 물로 심판을 하셨을지라도,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무지개로 언약하셨고,
의인을 찾으셨습니다.
광야에서 목이 곧아 패역한 백성들을 향하여 분노함으로 “다 죽이리라” 하셨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차라리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하소서”라는 모세의 중보의 기도를 들으시고 분노를 거두셨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듯, 아니 혹시 어미는 아이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여러 고난을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고난이 다 징계는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심으로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죄로 죽어가는 인간 안타까와 인간 되셔서 대신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외에 이러한 사랑을 가진 자 누구입니까?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고전 10:13).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면 머지 않은 날에
“귀로 듣기만 했던” 주님을 “눈으로 보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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