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너 옛날에는 교회 안 다녔었쟎니?”
이제 40줄에 들어서 아줌마 티가 완연한 친구는,
스무 서너 해 만에 중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만난 단발머리 새침떼기 여학생이었던 친구는,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영순이(바로 본인)도 예수쟁이(?)다’라는 다른 친구들의 말에
의외라는 눈을 하고서는 물었습니다.
“그랬지?
그 땐 너희가 나보고 교회 나오란 얘기 한번도 하지 않았거든.”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하지 않는데 어떻게 듣겠습니까?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전할 사람이 없어서 전도가 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본인들이 처음 믿을 때의 그런 뜨거운 마음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무디어 갑니다.
마치 모서리가 날카로운 회전기구가 오랜 세월 돌아가면서 점점 무디어지듯,
강 속의 돌이 세월에 깎여 밋밋해지듯,
신앙 역시 타성에 젖어 든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은 앵무새처럼 주워 섬기지만,
밥 먹듯 주워 섬기는 ‘빛과 소금’ 되고 ‘복음의 증인되자’는 그 말씀이
‘울리는 징과 소리나는 꽹과리’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일 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모는 왜 나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셨으면서도 나보고 ‘교회 나가자’고 한 번도 말씀 안 하셨어요?”
하고 모처럼 놀러 오신 집안 고모께 느닷없이 물었습니다.
그 질문의 밑바닥에 깔린 저의란 ‘일찍부터 주님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아쉬움이었습니다.
고모는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는 벌써 아셨을테구요.
전도를 하다 보면
“야! 예수를 믿어? 내 주먹을 믿겠다”,
또는 “너나 잘 믿어. 쥐뿔 가진 것도 없는 게, 너 예수 믿는다고 날 이길 수 있냐?”
하는 조롱 섞인 박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자그만 주먹에다가 예수님을 비교하겠습니까마는,
천하가 다 예수님 것인데 가진 것을 논하겠습니까마는,
예수님의 대속하신 보혈의 십자가를 인생의 하찮은 힘겨루기에 비기겠습니까마는,
듣도 보도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알 수 없기에 가까이 있는 자기 주먹만큼 실용성이 없을 거라는 억지일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건 어쨌건,
먼저 믿은 사람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들 모두에게 주님이 분부하신 공통된 사명이건만,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핍박과 조롱과 온갖 고난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을 꺼려하여 입이 달라붙습니다.
이제는 좀 담대해집시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술 마시는 친구들 모인 자리에서 돌아가면서 노래 한 곡씩을 부르는데 자기 차례가 되어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하는 복음성가를 부르다가 두 소절 째 들어가기 전에,
“저 자식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말이 맞는 말이지만 관심이 없다면 왜 분위기 깨지겠습니까?
그냥 들으면 그만이지요.
그 성가의 주인공은 아직도 늠름합니다.
결코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면박을 준 친구의 마음속에 겨자씨 만한 믿음 생기길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는 깨진 분위기에 예수 크신 사랑이 접목될 날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빼랍속 사금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서도 사랑이 그립습니다(97.10.12) (0) | 2019.04.14 |
---|---|
사랑의 매는 아파도 덧나지 않는다(97.08.30) (0) | 2019.04.14 |
이렇게 준비합시다!(97.08.10) (0) | 2019.04.13 |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까?(97.08.10) (0) | 2019.04.13 |
형광등 불빛 대낮 같아도…(97.07.13) (0) | 2019.04.13 |